Facebook /이세형목사/협성대학교
20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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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라인홀드 니버의 serenity기도가 생각난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있다.
그렇다. 지헤가 필요하다. 지혜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얻어진다. 하이데거는 죽음 앞에선 존재자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지만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살필 수 있는 곳이 많다. 폴 리쾨르는 우리가 신체를 가진 것에 주목했다. 데카르트의 자기 정립적인 코기토가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정신에 위치시킨 것을 지적하고 있다. 어디 절대적인 정신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몸의 소리.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지혜로운 자의 삶의 될 것이다. 몸은 우리의 인생을 기억하고 있고 이전 세대의 것까지도 기억한다. 입양된 아이들이 자기 몸의 조상의 언어를 더 쉽게 습득하는 것은 타고난 몸의 기억 때문이다. 몸의 소리를 들어보면 멀리는 자연과 대화도 가능해진다.
유한한 것으로 우리의 언어 세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 않는다. 하는 말과 그 하는 말 속에 담긴 뜻이 다르다. 프로이트는 의식이 주인이 아니고 무의식이 주인이라고 했다. 내 안에 억압된 그것이 억압하는 자아보다 앞선다. 우리가 하는 말의 실수, 실책, 꿈 등은 우리의 의식의 한계를 드러내준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식을 살피는 것을 넘어 무의식을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억압된 무의식은 우리의 삶에 증상을 낳는다. 증상은 우리에게 해독을 기다리는 부정적 상징이다.
상징은 유한한 세계 너머의 무엇을 가리킨다. 인간이 상징을 사용한 것은 지금 나의 한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징은 고유한 의미를 넘어 상징이 지칭하는 의미의 세계로 항하게 한다. 그래서 상징은 다층적이고 다 의미적이다. 그리고 그 상징은 과거의 깊이로 미래의 높이와 넓이로 열려진다. 이 상징을 해독하는데 우리게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고 설명하여 현재의 해석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존재함으로 행하는 사건을 만들며 며래로 향한다.
유한한 우리가 유한함을 넘는 지혜는 해석을 통해 가능하다. 성경을 읽되 해석하며 읽어야 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광폭한 광신이 나온다. 확신에 찬 목소리들은 해석하지 않고 내 밷는 말들이다. 때문에 해석하려고 하는 이들은 천천히 돌아가는 덕을 지닌다. 해석하면서 나를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면서 나의 유한성을 알아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게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타자를 진리의 도상에 선 사람으로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갈 동반자로 초대한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이는 엄마와의 만남을 통해 심리가 탄생된다. 아이는 아버지를 만나면서 사회적 구조와 법을 배운다. 기본적인 너가 없다면 나는 탄생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통해 나를 세워가고 알아가고 성장시켜 간다. 내게 너가 있다는 말은 나는 너를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말이다. 유영모는 인간은 사이존재라 했다. 도가 사상에서는 존재가 사이에 존재한다. 유와 무 사이에 존재가 탄생한다. 성서는 혼돈 가운데 말씀과 더불어 존재가 탄생한다. 말씀은 기표이다. 라캉은 기표와 기표 사이에 의미가 미끌어져 들어온다고 했는데 이 의미의 탄생이 자아의 탄생에 다름 아니다. 리쾨르는 기표 이전과 기표 이후의 사이로 의미가 탄생한다. 바로 이 자리가 창조의 자리이고 구속의 자리이고 변화의 자리이다. 새로운 변형은 사이로부터 온다. 이말은 나의 존재가 너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찌 나를 그렇게 강력하게 확장한다든지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체가 있어 정신이 있고, 상징이 있어 의미가 있으며, 너가 있어 내가 있다면 우리의 말의 세게는 들음의 세계가 먼저다. 기도는 들음이다. 삶은 들음이 먼저다. 배움도 들음이 먼저다. 들음이 먼저라는 말은 지금의 내가 있기전 나의 이전 나의 본원이 있다는 것이다. 들음으로 나의 본원이 드러난다는 말은 들음에 나를 내어줌으로 내가 진정으로 내가 탄생 된다는 말이다. 들음으로 탄생되는 나는 듣기 이전의 나가 아니다.
신체를 입고, 의미를 입고, 타자를 통과한 나는 확고한 나가 아니다. 언제나 변화에 열려진 나이고 끊임없이 탄생되는 나이다. 이것이 유영모가 말하는 젊은이다. 절 묻는이다. 또 하루의 시작이다. 하루는 나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묻지 않고는 가던 길이 멈춰지지 않는다. 멈춤이 없이는 결코 우리가 반복한 것을 돌아볼 수 없다. 우리의 반복을 돌아보는 것이 새로운 정신적 영적 치유의 길이다. 반복을 돌아볼 때 반복한 수를 헤아릴 때 우리는 살아온 것들을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할 때만이 상징을 만들 수 있으며 상징을 해석하는 일로서만이 우리는 의미를 창출할 수있다. 돌아보아 자신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나로 탄생되어 간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인가 해석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다. 내 존재를 넘어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와 존재자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 넘어섬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의 신비를 경험한다. 오. 내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오. 어찌 내가 하나님을 뵈울 수있으리?!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며,은유와 비유와 담화를 통해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말씀인 것은 말씀을 해독함으로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말씀하셨다. 들어 읽어라.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들어 읽고 읽어 해석하라. 해석의 과정에 들어서라. 해석하지 않아 역사는 반복한다. 반복을 끓으려는 이들은 이제 증상과 증후들을 해석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생각하는 민족의 과제다. 이 깊이에서 함석헌을 외쳤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오.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2017년 1월 19일 목요일
2016년 12월 10일 토요일
2016년 11월 28일 월요일
예수
(2016.11.27.)
조환기 목사
성경 : 시편 139: 1~10, 마태 1:21
오늘은 대림절(Advent, 강림절) 첫 주이다, 대림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어떤 예수를 기다리는 것일까? 예수가 와서 세상을 심판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시편 1:2)
오늘의 본문 시편 139편 그리고 마태복음 1:21 은 유대교 신앙의 핵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1)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全知全能, 無所不在)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게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를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다. 이 신앙이 분명하면, 이 신앙이 사람의 중심에 있으면 큰 과오를 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주님은 다 아신다. 그러기에 그분은 위로하고 권면하고 마침내 심판하는 것이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 9:27)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다. 추수 감사절의 기원은 1620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충격이 영국으로 밀려들자 대륙에서처럼 영국에서도 깊은 도덕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청교도(Puritan)란 주로 장로교인들 말하는데 그들은 성서와 칼빈주의 노선을 따라 영국에서의 교회 생활의 체제 및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개혁하고자 했다. 교회와 사회 전체 노선들을 관통하는 생활과 태도의 전면적인 개혁윤리였다.
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영웅상이 있었다. 청교도 시대의 영웅은 경건한 사람이다. 경건하다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전능하신(전지, 무소부재)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완전하심을 그의 삶의 표준으로 삼는다. 경건한 삶이란 곧 의로운 삶이다. 그 의란 공평한 정의 (even-handed)와 인색하지 않은 호의(open-handed)이고 세상은 의를 나타내는 곳, 의를 표현하는 곳이다.
청교도들은 그의 직업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엄격하게 감당함으로써 그가 지상에서 사는 동안 청지기의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했는가를 보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최후의 심판에 대비한다.
(2)예수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사로부터 전해진 이름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 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유대 사람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 예수만이 그 이름값을 한 것이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나시기 전에 지으신 그 이름 예수
(찬송가80장)
왜 예수 그 이름이 그토록 귀하고 높은가? 그 이름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죄는 암이나 병균과 같아서 사람을 파괴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서 두 사람에게로 점점 퍼져나간다. 어떤 시대 어는 곳에서나 사라마을 불행하게 하고 큰 물의를 일으키고 멸망케하는 배후는 바로 죄이다. 이것은 불변이다.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회는 불행하다.
사람이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3,5)
존 웨슬레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완전을 강조했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인의 불완전함을 몇 가지로 열거했다.
1. 지식 2. 실수 3. 결점 4. 유혹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이런 불완전함에서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가?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도 자연적인 삶에서처럼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중 어떤 이는 갓 태어난 아기라 해도 하나님께로 태어난 이들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완전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죄를 생각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 14:7)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요 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 14:10)
예수와 하나님이 한분이시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다. 증명하거나 보여줄 수는 없다. 다만 믿을 뿐이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브리 12:2)
예수는 이름과 같이 사셨다. 십자가는 그분의 이름이 완성된 것이다. 이름은 존재의 상징이다. 과연 예수는 아름답게 사신 것이다.
(3)한국교회는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폴 틸리히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의 형상은 민주주의라 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고귀한 존재로써 평등한 존재라는 말이다. 평등성이 깨어지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이 있는 불행한 사회제도가 생긴다.
민주화에 역행하는 것은 마침내 사람을 사람답게 예우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예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 죄는 거기서 시작되고 그것이 죄이다.
예수는 사람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신다. 오늘도 우리는 그 예수가 나에게, 우리에게, 이 나라의 모든 삶속에 찾아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죄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며 살아야한다.
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엘림회 기도문
은혜로우신 하나님
지나간 한 달도 우리를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늙어 힘은 없어도
우리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나안 복지
우리의 삼천리금수강산을 사랑합니다.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을 키워왔고
우리에게 주신 기름진 넓은 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넓혀왔습니다.
반만년 오랜 세월 생명을 다 해 이 나라를 지켜왔고
대대로 이 땅에서 배우고 일하며 나라를 가꾸어 왔습니다.
아직 남북으로 나뉘어 통일을 이루고 살지는 못하지만
한 핏줄인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곧 하나가 되리라 믿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시끄럽습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하여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야단들입니다.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시옵소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인지
어떻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어렸을 때 만난 우리 친구들이 모여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주여 이 예배를 흠향하여 주옵시고
주님께서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6년 9월 25일 일요일
우리가 믿고 있는 분
제자들 앞에서
무능하게 체포당해 끌려가신 분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채찍질과 수모를 당하신 분
(정말 모든 능력을 상실했었을까)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언덕에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하신 분
(권력자들은 승리의 표시로 반항자들을 죽여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방치한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사신 분
(하나님만 할 수 있다)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부탁 말씀을 남기셨다
(사명을 마치고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세상 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
(제자들의 의무이고 도리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우리는
얼핏 무능해 보이는
(세상의 안목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런 청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믿음이다. 영생의 길이다)
무능하게 체포당해 끌려가신 분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채찍질과 수모를 당하신 분
(정말 모든 능력을 상실했었을까)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언덕에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하신 분
(권력자들은 승리의 표시로 반항자들을 죽여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방치한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사신 분
(하나님만 할 수 있다)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부탁 말씀을 남기셨다
(사명을 마치고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셨다)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세상 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
(제자들의 의무이고 도리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우리는
얼핏 무능해 보이는
(세상의 안목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런 청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믿음이다. 영생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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