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8일 월요일

19. 고명균 목사님

년말이 되면
아내에게 박아지처럼 듣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남처럼 복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요

그러면 의례히 이렇게 답을 하곤합니다.

못받다니요
이 보다 얼마나 더 받아요
넘치게 주셨는데요

하면서 아내를 끌어안곤합니다.
아내는 뚱뚱하여 한 아름에 안을 수가 없습니다.

년말이 되면
목사님들이 제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우들 중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취직을 시켜줄까
사회봉사비를 얼마씩 줄까
기도를 많이 시켜볼까

그러면서도
성공하여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기쁨과 보람, 걱정과 근심을 함께 하시는 듯 합니다.

1979년 봄
신병을 위하여 기도하러 두달간 대한수도원에 있었습니다.

그 때 77세의 고령이신
고명학원 이사장이시던 고명균 원로목사님이
주강사로 오셨습니다.

홍현설 박사님과 감신 동기동창이신 전진 원장님이 사회를 보시면서
고명하고 고명하다는 말이 들어간 성경구절을 읽으셨습니다.

고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저 전진 원장님이 사람 볼줄을 알아
내가 고명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내가 뭐 사례금이나 타먹으려고 이짓하는 줄 알아
내가 이래뵈도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에요
먹고 사는데 하자가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왜 이렇게 됬느냐
평생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드니
하나님이 다 그렇게 만들어주셨어요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축복을 해주셨는가
첫째 내평생 내 주머니에 돈을 떨이지지 않게 해주셨어요
볼래 ... 자 이거봐

하시면서 양복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5,000원권 하나를 꺼내시고는

봐 여기 있잖아~
기대하던 사람들은 와 웃고 말았습니다.

이봐요
아 마귀자식들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뭐하러 저 높은 산동네에서
쥐처럼 살아요

열심히 기도하고 나처럼 복을 받아서
멋있게 살아요

과부들도 울면서 혼자 살지 말고 시집들 가
그래서 행복하게 살아요
이 할아버지가 시켰다고 그래

년말이 되면 크리스마스가 오고
또 송구영신의 준비를 합니다.

그럴 때마다
고명균 목사님의 JOKE같은 호령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봐요
아 뭘 그렇게 쪼그라들게 살고 있어
열심히 기도하고 한 번 힘을 내서
뽄떼있게 살아봐요

그것은 아마도
평생을 나와 동행하여 주시는
목사님들의 마음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해봅니다.

18. 이재은 목사님

우리가 목사님을 뵈오러 교회를 찾아가면
늘 문이 열려 있었고
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고는
사모님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어서와요
하고 나오시며 방으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누가 왔어?
하면서 서재에서 책을 보시던 목사님이
우리를 반겨주셨습니다.

서재에 안 계실 때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다가 나오시었습니다.
목사님은 등이 거북이 등이라고들 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책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시느라고
등이 구부러저서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재은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
불타버린 교회의 폐허 위에 천막을 치기 위해 터를 닦을 때,
러닝 셔츠 차림으로 삽을 들고 땀을 흘리며 일하시던 모습은
모든 교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목사님은 설교를 하고 심방 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나 해주시는
거룩한 분으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분이
우리와 함께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와 함께 우리의 방법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격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에서
교인들은 새 힘을 얻게 되었고
천막을 친지 얼마 안되어 새 교회를 짓게 되었으며
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었고
교회를 통하여 많은 일군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힘차고 자신 있게 일하시었습니다.

우리는 그 힘과 용기를 어떻게 갖게 되신 것인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목사님은 중학교(6.25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지 않고
6학년까지 있었음) 대대장이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학교 대대장이라고 하면
조회 때 앞에서 차려, 경례를 큰소리로 외치는
덩치가 큰 학생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6.25 이전의 학교 대대장은 격이 지금보다 높았습니다.
군대 편제를 갖춘 학도호국단의 지휘자로
유사시 군대의 대대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그런 조직의 지휘자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학교 소년단원(Boyscout) 30여명을 인솔하고
개성서 피난을 나오셨다고 합니다.
30여명의 단원들을 인솔하고 부산까지 내려가신 목사님께서는
은영극장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 단원들과 함께 있으면서
부두노동 등으로 숙식을 해결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신학을 공부하시고(감신 정규4년제 제1회 졸업)
군목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목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시면서
삼청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행정에 있어서 매우 조직적이시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기관과 속회와 선교회에 소속되게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교회에 나오면
해야할 일과 직책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교회 뜰이나 주택에 모여
우리가 좋아하는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때의 시간들이 자연스러운 카운슬링이 되었고
각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요한 시간들이 되었으며
후에 청년속회로 발전하게된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철학에서부터
국가관, 시국관, 동양철학, 서양철학,
심지어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의 문제도 다루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더라도
누구의 말이든지 진지하게 들어 주셨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항상 그 평소 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우리가 평소 토론하던 문제들을
성경을 통하여 해답을 주곤 하시었습니다.

그 때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가난이나 무식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없었고
모두 교회를 통하여
사랑과 용기와 보람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목사님과 함께 하던 그 시절을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청년들은
지금 모두 60대 중반에서 70대 초반 사람들이지만
그 즐거웠던 낙원을 생각하며
가끔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의 청년들은 목사와 장로와 권사들이 되었지만
지금도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재은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실까
생각해 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수요예배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 위경련이 일어나셨습니다.
배를 웅켜 잡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계셨습니다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온 교인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약 5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병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리로 모시고 갈 생각은 않고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침을 잘 노으시던 권사 님이 오시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요 예배에 참석하는 남자어른이 별로 없던 때라
모두 권사님만 쳐다보고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권사 님은 목사님을 진맥하시더니 장경련이라고 하면서
시간이 되었으니 먼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침을 놔드려야겠다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권사 님이 대신 인도하신 수요 예배는 30분만에 끝났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권사 님이 침통을 꺼내어 목사님의 이곳 저곳에 침을 찌르더니
얼마 후 목사님의 통증이 멈추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 일로 두고두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재은 목사님에게
큰 빗을 진 사람의 심정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아파서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으면
목사님이 예배부터 드리고
천천히 권사님을 찾아 침이나 놔주도록 하셨을까?

목사님께서는 분명
얼른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 가셨을 것입니다.

침을 먼저 놓고 나서 목사님이 안정되시는 것을 보고
시간이 좀 늦게 예배를 드리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셨을까?

목사님의 병원비를
교회재정에서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하였나?

예배를 먼저 드리다가
그 사이 목사님이 잘못되셨으면 어쩔 번하였나!

우리들은 전형적인 바리새인 이었다.
교인들은 그 때 일을 늘 부끄러워하였고
자랑하던 신앙에서 겸손해지는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늘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목사님의 설교말씀 제목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생활로 보여주신 그 모습들은
어느 설교 말씀보다도
강하게 내 심령에 들려오는 로고스가 되어있습니다.

17. 교회의 종소리

주택에서 예배당 강도상으로 직접 들어가는 통로에
종탑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후에는 교회 문 옆으로 옮겨 졌지만
6.25 직후까지 그 곳에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반과 5시,
수요일 저녁 7시와 7시반,
주일 아침 10시 반과 11시,
주일 저녁 7시와 7시 반
뗑그렁뗑~
소리를 내며 삼청동 골짜기에 울려 퍼졌습니다.

종은 2번 씩 첬는데
예배시작 30분 전에는 예비종을 첬고
본종은 예배 시작 직전에 첬습니다.

보통은 교회사찰이 첬지만
가끔 우리들이 치면서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꼈었습니다.

뗑그렁뗑~ 뗑그렁뗑~

종을 치면서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마음속으로 외쳐보기도 하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칠 때도 있었습니다.

사찰집사님 외에는 나와 최정호 권사님 아드님인 서효철,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
행방을 알 수 없는 최광진,
소격동 파출소 뒤에 살던 김갑기가 단골 손님 이었습니다.

예비종과 본종은 달랐습니다.
예비종은
20번 치고 한번 쉬고 또 20번치고 한번 쉬면서
대충 2분에서 3분 정도 첬고,
본종은
쉬지 않고 계속 1분에서 2분 정도 쳤습니다.

종을 칠때면
씰구럭쌜구럭~ 함석지붕에서 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동네 사람 아무도 시끄럽다고 항의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만 하여도 시계가 흔치 않은 때라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의 시작시간을 알 수 있었으며
저녁 식사시간을 가름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삼청공원에서 내려 오면서 공원을 벗어나면 종소리가 들렸고
경복궁 입구에서 교회를 향하여 조금 올라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국동 목욕탕 근처와 청와대 고개,
동부삼청동으로 넘어오는 가회동 마루터기에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종소리는
뗑그렁뗑~
늘 맑고 깨끗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소리가 들리는 곳을 삼청교회의 영역으로 선포하는
외침과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 종은 1950년대 말까지
새로 지은 벽돌교회의 종탑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멜로디가 담긴 종소리가 나는 암푸시설을 한 후
주민들의 소음공해 항의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종은
어느 시골교회에 보내졌는데 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감사하다고 특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삼청교회에는
종탑은 있으나 종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삼청교회뿐만 아니라
서울의 어느 교회도 종을 치지 못합니다.

소음공해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염불을 외우던 산속의 절에서는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염불소리를 온 산에 들리게 하는데
종을 처서 교회의 예배를 알리던 교회의 종소리는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누가
그 종소리를 대신 할 것인가요?

주께 두손 모아 비오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쳐 주소서
오 주여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16. 고흥배 목사님

1958년 육사 군목이시던 이재은 목사님(정규 4년제 감신대 1회 동기동창회 총무)이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신 후
그 이듬해인 1959년에 교회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화재로 소실된 교회 부지를 교우들과 함께 고르고 천막을 친 후
건축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군에 입대하면서
유년주일학교 예배는 정OO 장로 혼자서 맡아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그는 올갠을 칠줄 알아서
올갠반주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니
퍽 능율적(?) 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로부터 두달 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온 나는
깜짝 놀라게 발전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신축을 시작하여 지붕과 외벽과 천정이 다 되어 있었고
비록 아직 마루는 깔지 못하였으나
아름다운 교회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교회학교는 교사들로 꽉 차서 분반 공부를 하고 있었고
신학교에 다니는 웬 날씬한 미남자 하나가
교회학교 부장 겸 성가대 지휘자로 맹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신 4중창단 멤버인
고흥배(부평 부광감리교회 원로목사)선생 이었습니다.

고선생은 우리보다 3~5살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우리와 함께 어울리면서
청년부, 교회학교, 성가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일이 아마 목회실습 겸 실습전도사 시무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고선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이 그치질 않았고 청년부나 교회학교나 성가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일할 수 있는 청년들의 인적자원이 부족하던 때이라
전원이 청년부회원, 전원이 교사, 전원이 성가대를 하면서
주일날은 아침에 나오면 모두 저녁 밤이 늦어서야 헤어지곤 하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청년들을 형제와같이 여기며 사랑하시던 이재은 담임목사님의 수고와
중간 지도자이셨던 고선생의 리더쉽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고선생은 27살에 동갑인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하셨는데
결혼식장에는 감신4중창단이 핔엎(작은 반트럭)에 올갠을 실어갖고 와서
올갠반주와 4중창으로 결혼식 음악 전체를 진행했었습니다.

집이 먼고로
주일날 일이 늦게 끝나면 청년들과 같이 아무데서나 눈을 붙이곤 했었는데,
한번도 고선생의 얼굴에서 힘들다거나 지친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늘 무슨 일을 하던지
즐겁고 기쁜 모습으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고흥배 원로목사님은 부평에서 제일 크고 감리교회서 몇번째 갈
큰 교회(건평 약2,500평)를 증측하시고 은퇴하셨습니다.

공사가 한참 진행중일 때
고목사님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 내 후년이면 은퇴하실 터인데
무엇하러 고생고생하면서 건축을 하십니까 』
(목사님은 그 때 뇌혈관 질환으로 고생을 하고 계셨습니다)

『 아 그래야 다음 사람이 와서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싶을 뿐이야 』

교회가 그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분의 중창단 활동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는 학번별 4중창단이 있었는데
고선생이 활동할 때 몇년간은
대학 중창단 콩클대회에서 우승을 도맡아하곤 했었습니다.

대학부의 감신 4중창단은
고등부의 숭실고등학교중창단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중창단의 무엇이
고선생을 성공적인 지도자로 만들었을까?

다른 사람의 소리와
다른 사람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호흡에
내가 조화를 이루어 가는것

고선생이 삼청교회에 계신동안
온 교회가 평안하고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만나보면 여전히 함박꽃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시면서
입을 열면
금방 무슨 즐거운 소식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다림을 갖게하는 목사님이십니다.

고목사님은 전도사이시던 어머님의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고
목회 초기에는 병으로 고생을 하셨는데도
한번도 낙심하거나,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하는 모습이 없었고
늘 기쁨이 충만하고 삶의 용기가 샘솟듯하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 용기와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전도사님이시던 어머님의 기도와
삶 속에서 늘 동행하시던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 때 그 4중창단이 지금 다 생존들하고 계신지 알 수 없으나
그분이 좋아하면서 같이 불러주던 4중창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는
늘 웃음이 활짝 핀 고흥배 목사님의 얼굴과 함께
내게 기쁨을 갖어다 주는 찬송가입니다.

고흥배 원로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일산에 있는 원로목사님들의 교회에 출석하시다가
지난 2006년 10월 31일 미국 뉴저지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아드님이 목회하시는 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평안한 여생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5. 코메디언 백금녀

살살이 서영춘과 뚱뚱이 백금녀는
유명한 콤비 코메디언입니다.

그 백금녀의 집이 교회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와 수양아들이 삼청교회에 다니었습니다.

후덕하고 인자하게 생기신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으로 예배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늘 딸이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따님에게 교회에 같이 가기를 권했습니다.

[얘, 교회에 같이가자]

[교회에는 왜요?]

[함께 예수를 믿다가 함께 천당에 가자]

[어머니가 신앙이 좋으시니까
난 어머니 천당 가실 때 어머니 발뒤꿈치 붙들고 따라 갈거에요]

[얘, 극장에 들어갈 때 보니까
극장표 한장으로 둘이 못들어 가든구나.
천당도 마찬가지야]

어느 날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끝내고 돌아온 우리들이
지친 몸으로 난로가에서 이얘기저얘기하고 있을 때
백금녀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반가히 맞아 들였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전 부터 교회에 나올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막상 교회에 나오려니까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잘 오셨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교회 한 옆 의자에 앉아 한 없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떠들석하게 농담을 하던 우리가 경건해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만난 백금녀의 모습은
코메디언도 연예인도 아닌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으로서 교회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고민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후
언니의 아들중 하나를 수양아들로 삼아 정을 붙이고
새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지방공연이나 외국공연으로 집을 비운 그녀의 집에서
그녀의 수양아들과 청년속 예배를 드리며 놀다가 오곤했었습니다.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모처럼 교회를 찾아온 그녀에게
어떻게 무슨 말로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안타까운 그녀의 모습을 뒤로한 채
우리는 한사람 두사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교회를 찾은 것은
그게 마지막 이었습니다.

집을 멀리 이사간 후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실 때 까지
삼청교회로 예배드리러 나오셨는데

그 후
백금녀가 교회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교회 구석을 두리번 거립니다.

백금녀와 같이 교회를 찾았다가
맥없이 돌아가는 사람은 없는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삼청교회로 보내주신 사람이라면 어떻게하나?

아니 그가 바로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이 만났던 천사이면 어쩌나?

백금녀가 어머니의 소원대로
믿음을 갖고 타계했으면 훨씬 우리들의 마음이 가벼울 터인데.....
........................................................................................

지금도 절망의 마음으로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은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교회의 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다시 절망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목적이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수가 왜 줄어들고 있을까요?
전도가 잘 안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문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려면
기독교인으로서 일정한 멤버쉽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멤버쉽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어느 교회에도 들어가 섞일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멤버쉽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멤버쉽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는 사교의 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대로 들어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