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5일 금요일

10. 새성전을 봉헌하는 어느 목사님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저는 교회학교 청년부와 대학부 부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거리의 데모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웨침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거리에서 그들의 웨침을 들으며 따라다녔고
저녁에 교회에 와서는 데모를 하다가 혹 누가 다칠까봐
우리는 몸으로 하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자고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친구들은 거리에서 다치고 죽고 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울고들 있었습니다.

그때 이웃교회에 있던 전도사님 한분은
그때의 일들로 옥고를 치른 후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노동자가 되어 일하시던 그분은
친구의 소개로 신학교 후배와 결혼하여 생활하던 중
전도사였던 아내의 권유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비록 못생기고 병든 교회이지만
그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나도 교회를 사랑하리라 결심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한지 약 20년이 채못되어
그 목사님은 새 성전을 건축하고 얼마후면
봉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영성훈련 지도자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불의한 일을 보면
의분을 참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더 이상
교회를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바로
교회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하며
우리들 자신을 채찍질하여 경건한 모습의 크리스쳔이 되었을 때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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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을 하면서 3.15 부정선거와
4.19를 경험하였습니다.

학보병으로 제대하고 복학하였을 때
5.16 군사혁명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사회정의를 꼭 실천할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복학한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소련의 소비에트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교수에기 질문하고
이를 변명하는 교수와 다투다가
진리가 아닌 학문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MYF 지방연합회와 전국연합회 임원으로 있을 때에는
다른 임원들과 함께 총회를 참관하면서 흥분하기도 하였었습니다.

그 후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직장에서 은퇴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몇년 후면 시무를 그만두고
은퇴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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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세상은 혼란스럽고
세상을 아름답고 의롭게 사는 지혜를 구하는 교우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
주님의 사랑과 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 뿐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감리교회에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10명의 목사님들이 계신 한
우리 감리교회는 발전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님들이 저에게 들려주신
예언의 말씀들입니다.

9. 서울 엠마오 가는 길 6기

일영 연수원에서 열리는
Seoul Walk To Emmaus를 위하여
매주 한번씩 연수원에서 준비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5~6명씩 조를 짜서 나눔과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난 10월 준비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다른 장로님 한분과 목사님 3분이 있는 조로 편성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큰 교회와 중형교회 목사님들이 함께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년장자인 저부터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있었던 영적 체험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전보다 성경보는 시간이 적어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적어져서
걱정이라고들 말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새벽기도를 위하여 준비기도를 하고
새벽기도시간에 기도를 하며
하루를 지내는 동안 심방시간에 기도를 하고
심방을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며
설교를 위하여 준비기도를 하고
삶 전체가 기도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갈 수록 목사님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평신도중 어느 누누가 이런 목사님들의 기도만큼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새벽기도를 위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심방을 위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심도있게 연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열심있는 평신도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은
평신도인 저에게 년장자에게의 예를 갖추어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저는 그 기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감리교회에는 훌륭한 인격의 목사님들과
큰 믿음의 신앙을 가지신 감리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고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님들의 열정이
Walk To Emmaus 기간 동안
모두 함께 주님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모든 교회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뜨거운 체험을 갖었던 일이 체험되어지는
거룩한 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감리교회 교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8. 선생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

몇년 전,
기도원 집회에서 190cm의 큰 키에
늘 반달 웃음을 웃는 H교회 J군을 만났습니다.

방사선과 기사의 직업을 갖고 있는 그는
Song Team 중에서도 기타보다는 Drum을 특별히 잘치는
30대 초반의 청년인데

그의 노래 반주하는 모습을 보면
동그란 모습의 작은 안경을 쓰고
늘 기쁜 모습으로 Drum을 치곤합니다.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즐겁고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은 참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를 잘 아는 같은 교회의 장로님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 장로님의 걱정과는 달리 늘 밝고 명랑하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저렇게 기쁘고 행복한 젊은이로 가르치고 키워 놨을까?

한번은 그에게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 누구이셨나?]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J 목사님이구요
중고등부 때 선생님은 S 목사님이에요

그 두분 목사님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으로 계실 때
내 신앙의 기초를 만들어 주신 분들 이에요]

그는 서슴치 않고
나는 누구누구의 제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J 목사님은 현재 서울시내 교회 교육담당 부목사님이고
S 목사님은 현재 뉴질랜드에서 이민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입니다.

두 분 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계시거나
영성훈련 강사로 활동하시는 감리교회 목사님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우리 교회 믿음의 후배들은 ?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쳐 주고
선배가 후배를 지도해 줍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선배이기도 합니다.

60 여년의 세월동안
나는 어떤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나?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소개해 주었나?
나로 인하여 실족한 후배는 없었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선배에게서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결국 믿음이란
먼저 체험한 자가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내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선배인가요?

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J군 같은 형제,
늘 확신 속에 후배를 지도할 수 있는
40세 전후의 J목사님과 S목사님 같은 분...

나이와 관계없이 그 분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고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기쁨과 참 평안을 얻지 못하는 한 ,
그분들은 영원히 나의 스승이고 선배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7. 한기모 목사님

환갑이 지나신 함경도 출신의 한기모 목사님이
삼청교회에 부임해 오신 것은 1955년 이었습니다.

천안지방에서 감리사를 지내신 중진 목사님이
생철지붕의 작은 판자집 교회로 오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멋쟁이이셨습니다.
커다란 키에 늘 인자한 미소를 띄고 계셨으며
코넷을 잘 연주하셨는데
부임하시는 날 코넷으로 찬송가를 연주해 주셨습니다.

위로 따님 두분이 있으셨고
아래로 아드님 세분이 있으셨는데
목사님을 닮아서 모두 음악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둘째 따님은
가끔 특별찬송으로 은혜를 받게하였고
목사님의 가족들과 교우들이 합하여
비로소 모양을 갖춘 성가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많이 부흥하였고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많이 활성화 되었었습니다.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부임지를
왜정시대 기독교 학살사건으로 유명한
제암리교회를 택하였습니다.

모두 두려워 가기 꺼려하던 곳을
자청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유명한 조신일 목사님과
친구사이 이셨습니다.
그 아드님인 테너 조진걸 씨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안구를 기증하기로 하고
연세대 의대에서 수술대에 누어 기다리던 중
조진걸 씨의 경우 안구 이식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는
의사들의 최종 진단을 받고 중단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생전에 연세대 의과대학에 사후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 의과대학에 가면
한기모 목사님의 유골이 표본으로 정리되어
진열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큰 사위가 군목으로 계셨고
아드님 중에서 목사가 된 분은 없었습니다.

그 중
목사님에게 제일 귀여움을 받던 막내 아드님이
미국에 이민하여 컴퓨터 기술자로 크게 성공하여 풍요로웁게 살다가
의과대학 연구용으로 보존되어 있는 아버님의 유골을 보고

아주 고귀하고 거룩한 아버님의 삶을 생각하며
그 모든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늦게 목사(미국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아드님 목사님은
소천하시기 전의 늙으신 모습의 아버님 사진과
표본으로 진열된 아버님의 유골사진을
함께 가슴 속에 늘 갖고 다니며
어려울 때 마다 아버님의 사진을 꺼내보면서
새로웁게 다짐을 하곤 한다고 합니다.

나는 고생스러운 가난한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발자취를 따라 거룩한 길을 택하였다고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옛 교우들에게는
아버님 생전에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이 계시면
아버님 대신 사죄를 청하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시면서
최선을 다하고 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교회가 작고 가난한 교회라
한기모 목사님과 목사님의 가족들은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한기모 목사님의 아드님 목사님은
어려서 자란 삼청교회가
그리고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는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죽음 이후 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의 모든 것을 헌신하신
한기모 목사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려 살길을 주었다
내 몸을 드리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드리었건만 날 무엇 주느냐

6. 할렐루야 집사

삼청교회에 다니던 분들 중에
할렐루야 집사로 알려져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그냥 집사님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외부에서는 할렐루야 집사라고들 불렀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에
점심시간이면 크리스쳔 직원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수요일 예배와 주일 저녁예배 시간에는
다른 교회에 다니며 간증과 찬양을 하였습니다.

회사의 차장이던 그분은 부장 진급을 앞두고
국장을 찾아가서 진급 누락부탁을 하였습니다.
이유인 즉,
지금은 차장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여러가지 교회봉사를 할수가 있는데
부장이 되면 그렇게 할 시간이 없으니
꼭 누락 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국장은
평생 진급 부탁은 많이 받았어도
진급 누락부탁은 처음받았다고 하면서
참 기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일학교 유초등부와 중등부에서
교사와 부장으로 봉사를 많이 하였는데
반을 맡았을 때에는 5~6명의 반을
수개월 내에 20~30명의 반으로 키우곤 하였습니다.

어린이 전도협회 이사이기도 한 그분은
끝내 회사를 조기 은퇴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수년 전 여름
전곡 벽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분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군부대 앞에 간판 없는 여인숙 방을 두개 빌려서
큰 방은 예배당으로 쓰고 작은 방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어린이 전도협회 총무 강갑중 목사님이 오셔서
어린이 성경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1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주일 동안 모두 열심이었습니다.

어른 교인들은 10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간판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간판을 하나 만들어 봉헌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의 셋집에 교회간판을 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회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교회건물을 건축한 후에 그 때 간판을 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간판을 달았던 교회가 어디 있었느냐고 하면서
간판이 없어도 이곳에 교회가 있다는것을
인근 십리 안팎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근처에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곳이 많아서
주일이면 6개처를 다니며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교회 6곳을 시무하는 셈이 됩니다.

서울에서 이사오신 한 권사님이
주일 저녁 예배와 수요예배에 가끔 빠지게 되니까
대뜸 충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시려면 권사을 그만 두시던가
아니면 다른 교회로 옮기십시요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려면
예배에 빠지시면 안됩니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그러다가 정말 안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바른 것을 가르치려고 목사가 되었는데
비위를 맞추려면 굳이 목사가 될 이유가 없지요
도시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이유도
도시에는 훌륭한 공부를 하신 분이 많으시니까
나는 그런 분들이 가지않는 벽촌에 있으려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도 목사가 된지 약 2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다니며 원주민 대상 집회를 하면서
약 6만명 정도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늘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후
시무를 끝내고 은퇴를 한 후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을 끝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과연 무엇을
주님 앞에 보고 드릴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