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이 지나신 함경도 출신의 한기모 목사님이
삼청교회에 부임해 오신 것은 1955년 이었습니다.
천안지방에서 감리사를 지내신 중진 목사님이
생철지붕의 작은 판자집 교회로 오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멋쟁이이셨습니다.
커다란 키에 늘 인자한 미소를 띄고 계셨으며
코넷을 잘 연주하셨는데
부임하시는 날 코넷으로 찬송가를 연주해 주셨습니다.
위로 따님 두분이 있으셨고
아래로 아드님 세분이 있으셨는데
목사님을 닮아서 모두 음악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둘째 따님은
가끔 특별찬송으로 은혜를 받게하였고
목사님의 가족들과 교우들이 합하여
비로소 모양을 갖춘 성가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많이 부흥하였고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많이 활성화 되었었습니다.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부임지를
왜정시대 기독교 학살사건으로 유명한
제암리교회를 택하였습니다.
모두 두려워 가기 꺼려하던 곳을
자청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유명한 조신일 목사님과
친구사이 이셨습니다.
그 아드님인 테너 조진걸 씨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안구를 기증하기로 하고
연세대 의대에서 수술대에 누어 기다리던 중
조진걸 씨의 경우 안구 이식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는
의사들의 최종 진단을 받고 중단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생전에 연세대 의과대학에 사후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 의과대학에 가면
한기모 목사님의 유골이 표본으로 정리되어
진열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큰 사위가 군목으로 계셨고
아드님 중에서 목사가 된 분은 없었습니다.
그 중
목사님에게 제일 귀여움을 받던 막내 아드님이
미국에 이민하여 컴퓨터 기술자로 크게 성공하여 풍요로웁게 살다가
의과대학 연구용으로 보존되어 있는 아버님의 유골을 보고
아주 고귀하고 거룩한 아버님의 삶을 생각하며
그 모든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늦게 목사(미국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아드님 목사님은
소천하시기 전의 늙으신 모습의 아버님 사진과
표본으로 진열된 아버님의 유골사진을
함께 가슴 속에 늘 갖고 다니며
어려울 때 마다 아버님의 사진을 꺼내보면서
새로웁게 다짐을 하곤 한다고 합니다.
나는 고생스러운 가난한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발자취를 따라 거룩한 길을 택하였다고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옛 교우들에게는
아버님 생전에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이 계시면
아버님 대신 사죄를 청하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시면서
최선을 다하고 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교회가 작고 가난한 교회라
한기모 목사님과 목사님의 가족들은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한기모 목사님의 아드님 목사님은
어려서 자란 삼청교회가
그리고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는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죽음 이후 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의 모든 것을 헌신하신
한기모 목사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려 살길을 주었다
내 몸을 드리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드리었건만 날 무엇 주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