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56. 최광진 Story

최광진 story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삼청교회의 역사에 빼노을 수 없는 인물이 최광진이다.
교회학교 유년부장을 오래하였고 교회주보를 원지를 가리방으로 긁어 등사판으로
밀어서 만들 때 오래동안 그 일을 맡았었으며 언제나 우리 모임의 선두에 있었다.
휘문중학교 다닐 때 중등부 회장을 지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산하여
약 1년간 철학 서적을 읽고 하산 하였다.
만화를 잘그려서 만화가로도 활약했으나 교제하는 힘이 부족하여
만화가로 대성하지 못하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가끔 교회 종탑을 사무실 삼아 몇달씩 칩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는 출품할 만화를 그릴 때 이었다.

그는 신앙토론을 할때는 늘 선두이었고 사상을 얘기할 때에도 늘 독보적 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우리 모두는 소위 철학이라는 단어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설익은 철학이라는 뜻으로 개똥철학이라고들 하였다.

그는 기도를 잘하였다.
실제로 많은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서모는 집에서 술장사를 했는데 이 것이 싫어서 집보다는
교회에서 생활을 많이 하였다.
책을 몇권 싸들고 교회에 와서 공부를하고 책을 읽다가 교회에서 잠든 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교회에 있는 시간이 남보다 많던 그는 교회일을 많이 하였다.
홍성배 선생님처럼 그도 많은 봉사를 하였다.

어떤 때는 장사 잘되게 해달라고 집에서 굿을 했다.
그러면 그는 자기 방에서 큰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그러면 무당이 서모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이다.
저 학생이 찬송가를 불러서 신이 안 내리니 찬송가를 못 부르게 하라고.
그러면 그는 더 크게 부르곤 하였다.
예수 믿는 것을 싫어했던 서모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와서 밥을 먹는 그의 밥상에
신발을 던지며 나무랐다.
그래도 그는 술취한 서모에게 대들지 않고 신발을 밥상에서 내려놓고
그 밥을 다 먹었다.

그는 가정을 선교지로 생각하고 기도를 해왔고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는 우리 집을
매우 부러워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어쩌면 그 친구도 예수님과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고행하는 스님처럼 많은 고생을 하였고 중년에 서모와 사랑으로 화해했으며
결혼하여 성남에 살고 있으면서 금자탑 학원의 국민윤리 강사를 했었는데
침뢰교단에서 목사를 하라고 권한다는 얘기를 들은 후
지금까지 근 십년 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환진갑이 다 지난 최광진의 찬송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가 평생을 사랑하던 찬송가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55. 박태선 장로

박태선 장로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삼청교회 청년들을 위한 얘기)

6.25 이후 박태선 장로의 부흥회가 서울 전체를 뒤흔들었다.
남대문교회의 장로로 있던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사경을 헤메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 하나님의 신령한 피를 받았다고
하면서 설교를 하고 다녔다.

삼청교회에서도 일주일간 부흥회를 하였다.
설교를 하면서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한다면서 성경책을 들어서
강도상의 책받침을 뚜드리는 바람에 책받침이 다 쪼개지고 말았다.
모두 죄지은 사람의 심정으로 아무소리들 못하고 있었다.
집회가 끝나면 배를 주므르는 안찰을 하였는데 죄가 없는 사람은
배가 물렁물렁하고 배가 딱딱한 사람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면서
더욱 힘을 주어 주물렀다.
나와 김갑기의 차례가 왔다.
배를 만지니까 간지러워서 배에 힘을 주게 되었다.
그랬더니 더 한참을 주므르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곤역을 치뤘다.
김갑기가 안찰을 받자 물어 봤더니 똑같이 웃음을 참느라고
배에 힘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역시 죄가 많은 사람들인가봐>하면서 웃고 말았다.

그 후 박태선 장로는 신앙촌을 만들었고 후에는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없는
천부교를 만들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다가 그도 결국 죽고 말았다.
그가 다녀간 후 교회에는 큰 불란이 있었고 그 후유증은 거의 3년이 넘도록
계속 되었다.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교회 강도상에는 아무나 서서는 안되고 또 아무나 세워서도 안된다는 확신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학교에서는 대체로 청년들에게 신비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에 기적이 없거나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박태선 장로의 경우처럼 잘못에 빠질 우려도 있어서 이지만
그 보다도 청년들에게는 수 십년의 세월이 은사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꿈꾸는 미래를 위하여 40년 계획을 세워보자
그리고 기도하면서 도전해보자
무엇이 불가능한가
주먹을 쥐면 바위를 부술 것 같고
눈을 감으면 저 1000억 개의 은하계가 있는 광활한 우주를 상상하게 되는
젊음을 은사로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 분 이신가 ?

54. 홍성배 선생님

홍성배 선생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나의 교회학교 선생님은 배재고등학교를 다니시던 홍성배 선생님이다.
긴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껑충한 키에 쉰 목소리의 홍성배 선생님은
절대로 미남이 될 수 없는 분이다.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로서의 그분의 열정은
지금까지 거의 그 유래를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삼청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본다면 김완호 선생님(지금은 목사님)정도가
비슷할 정도이다.

그 분은 동부삼청동에 살던 분인데 집은 잘사는 가정이었고
늘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가는 도중에 교회에 들려 기도를 하고
다음 주에 교회학교에서 사용할 물품들을 준비하셨다.
그분은 특히 성경장면들을 미리 그림으로 그려서 한장씩 보이면서
설교를 하는 시청각 교재를 사용했는데 <가미시바이>라고 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그 분은 청년이 되었을 때 일이었다.
한번은 <교회학교 기>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금방 어디서
붉은 공단 2미터 정도를 갖고 오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의 혼수용으로 어머님이 귀하게 준비해 노은 것을 죽 찢어가지고 온 것이었다.
모두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교회학교에 대한 그분의 열정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한 것 이어서 홍성배 선생님은 교회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삼청초등학교 정문 근처 경찰관사에 살던 미인과
전격 결혼을 하면서 교인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고
지금은 모 교회의 목사님으로 훌륭한 목회를 하신다고 듣고 있다.

내가 홍성배 선생님을 생각할 때 마다 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지금 껏 살아 오면서 그 분만큼 열정적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일 아침이면 전도를 하기 위하여 두부장사 종을 딸랑딸랑 치면서
앞장 서 가시는 그분을 따라 교가를 부르면서 동네를 한바퀴씩 돌던 일이 생각난다.

~~~한양성의 북악산 밑 삼청주일학교는
천진스런 유년들을 주께 인도하는 곳일세
  영광의 우리구주 우리의 대장이 되시도다
만만세 삼청동 유년 주일학교 만세 !~~~~

53. 삼청교회의 종소리

삼청교회의 종소리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주택에서 예배당 강도상으로 직접 들어가는 통로에 종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후에는 교회 문 옆으로 옮겨 졌지만 6.25 직후까지 그 곳에 있었다.
매일 새벽 4시 반과 5시, 수요일 저녁 7시와 7시반,
주일 아침 10시 반과 11시, 주일 저녁 7시와 7시 반
~뗑그렁뗑~ 소리를 내며 삼청동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종은 2번 씩 첬는데 예배시작 30분 전에는 <예비종>을 첬고
<본종>은 예배 시작 직전에 첬다.
보통은 교회사찰이 첬지만 가끔 우리들이 치면서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꼈었다.
~뗑그렁뗑 뗑그렁뗑~
종을 치면서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마음속으로 외쳐보기도 하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칠 때도 있었다.
사찰집사님 외에는 나와 최정호 권사님 아드님인 <서효철>,
지금 조선일보 부사장인 <안병훈>, 행방을 알 수 없는 <최광진>,
소격동 파출소 뒤에 살던 <김갑기>가 단골 손님 이었다.

예비종과 본종은 달랐다.
예비종은 20번 치고 한번 쉬고 또 20번치고 한번 쉬면서 대충 2분에서 3분 정도 첬고,
본종은 쉬지 않고 계속 1분에서 2분 정도 쳤다.
종을 칠때면 ~씰구럭쌜구럭~ 함석지붕에서 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동네 사람 아무도 시끄럽다고 항의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만 하여도 시계가 흔치 않은 때라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의 시작시간을 알 수 있었으며
저녁 식사시간을 가름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삼청공원에서 내려 오면서 공원을 벗어나면 종소리가 들렸고
중앙청입구에서 교회를 향하여 조금 올라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국동 목욕탕 근처와 청와대 고개, 동부삼청동으로 넘어오는
가회동 마루터기에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종소리는 ~뗑그렁뗑~ 늘 맑고 깨끗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소리가 들리는 곳을 삼청교회의 영역으로 선포하는
외침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 종은 1950년대 말까지 새로 지은 벽돌교회의 종탑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멜로디가 담긴 종소리가 나는 암푸시설을 한 후
주민들의 소음공해 항의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종은 어느 시골교회에 보내졌는데 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감사하다고 특별인사를 하였다.

이제 삼청교회에는 종탑은 있으나 종소리는 들을 수 없다.
삼청교회뿐만 아니라 서울의 어느 교회도 종을 치지 못한다.
소음공해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염불을 외우던 산속의 절에서는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염불소리를 온 산에 들리게 하는데 종을 처서 교회의 예배를 알리던
교회의 종소리는 이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제 누가 그 종소리를 대신 할 것인가?

<주께 두손 모아 비오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쳐 주소서
오 주여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52. 옛날의 삼청교회와 X-mas

옛날의 삼청교회와 X-mas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49년의 크리스마스:
양철 지붕의 판자집 교회는 마루바닥에 조개탄 난로를 때고 있었다
차가운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유독 크리스마스 때만은 교회가 꽉 차고 넘쳐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의 마지막 장면은 성극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 거지를 교회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뜨끈뜨끈한 떡과 군고구마를 사다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교훈으로하는 내용이었다

그 때 거지역을 한 <김재형>은 거지역을 너무 실감나게 잘하여
박수를 많이 받았다

그는 연극을 좋아하여 경기도상 연극부장을 거쳐
기독교방송 제1기 성우생활을 하였고, KBS-TV가 생기면서
방송사극 연출가로 대성하였으며 최근작으로는 <용의눈물>이 있다

성극이 끝나고 경품뽑기를하고 선물 분배가 끝난 후
구경꾼들이 다 가고 나면 학생들끼리 남아 올나이ㅌ(밤새움)을 하면서
놀다가 12시가 넘으면 새벽송을 나갔다

총리공관, 의전병원(지금의 수도육군병원), 파출소 들은 빼지 않고 다녔다
새벽송에서 받은 선물들은 동네 극빈자들(교회정문앞 36번지 판자집 거주자)과
계동에 있는 개척교회 상태의 원서동교회(계동교회의 초기상태)에 갖다 주었다

교회의 벽 쪽에는 긴 의자가 서너개 있었는데 대부분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았으며
노인이신 긴 흰수염의 김장로님이나 50대의 김도영 권사님 혹은 손님이 앉곤 하였었다

마루바닥이라 무릎을 꿇고 앉았노라면 발이 저리고 아팠지만
엎디려 기도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우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도 불편하여 자리를 이리저리로 고쳐 앉으며
시간을 지냈는데 유독 최민자 장로만은 무릎꿇는 것이 익숙하여
늘 조용히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강도상 왼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방석이나 청소도구를 넣어두는 창고로 쓰면서
조용한 기도를 원할때마다 그 창고에 들어가
문을 닫고 소리내어 기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