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61. 최준호 목사님

최준호 목사님

임진국 목사님이 퇴임하시고 새로 최준호 목사님이 오시는 날이었다.

어머니와 나, 원복선 권사와 이구연 등
몇 사람이 새로 오시는 목사님을 기다리는데
오후 3시쯔음 웬 청년이 가방을 들고 들어 왔다.

"여기가 삼청교회 입니까?"
"녜, 어디서 오셨에요?"
"제가 오늘 부임하는 최준호 목사입니다."

우리는 황급히 일어나 목사님을 맞이하였다.

사모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으며 돐이 조금 지난 종성이가 있었다.
사모님에게는 친정 동생들이 많았다.
7공주 집이라고들 했는데 목사님의 처제들이 교회에 오면
교회가 꽉 차는 기분이었다.

우리와 같은 또래의 이화여고 다니던 처제와 그 아래로 두명 정도가 자주 왔는데
우리와 성극도 같이하며 학생회 활동도 같이하곤했다.

수원 남양 출신의 최목사님은 젊잖은 미남이셨다.
그러나 달변가는 아니시어서 설교가 늘 부족하다고들 하였다.

그 때 옥인동 살던 한재현 선생이 성가대를 지휘하고
동부 삼청동 홍성배 선생이 주일학교를 맡았으며
청년부와 성가대에는 중동고등학교와 연대 철학과를 다닌 서성태 선생이 있었고
이대 정외과 안병숙 누님과
이구연, 김해성, 안병훈, 최광진, 임재천, 김재형, 송한규
김기숙, 조영자, 홍임선, 홍유선,김희원, 최민자, 원효정, 등이 학생회 멤버였고
교회 주택 끝방에 하숙생이 3명있었는데 그들도 청년회와 학생회에 동참하여서
중고청 합동 회의체인 [삐율라회] 총회 때는 약 60여명이 모였었다.

한동안 교회는 평안하였다.
그런데 박태선 장로와 나운몽 장로등의 부흥회가 시작되면서
각 교회는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한 은혜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었다.
(후에 박태선 장로는 천부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가 되었다.)

최준호 목사님이 퇴임하시고 천안지방 감리사를 지낸 한기모 목사님이 후임으로 부임하시게 되었다.

***서성태 선생은 장로를 거쳐 목회자가 되었으며,
     최준호 목사님은 후에 장로교 목회자가 되시었고,
     최준호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활약하시며 교단장을 역임하시고
     같은 교단에서 활동하시는 서성태 목사님은 최목사님 후임으로
     교단장을 역임하시었다***

60. M.Y.F.서울북지방연합회

M.Y.F.서울북지방연합회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60년에서 1970년까지 10년동안 활발한 연합회 활동이 있었다.
연합회에 주로 참가한 교회는 삼청교회, 계동교회, 자교교회, 종교교회,세검정교회, 중앙교회,
인왕교회, 홍제교회,평동교회, 혜명교회 등 이었다.
활동의 중심은 삼청, 중앙, 세검정, 종교, 자교, 계동 등이었고 여타 교회는 따라오는 정도이었다.

삼청교회 출신 지방연합회 회장으로는 정권모(목사,현 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소장), 나,
김득중(목사,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등이 역임하였다.

가) 정권모(목사)의 원래 이름은 정덕길이다.
그는 정덕용 장로를 따라서 삼청교회로 나온 진천 출신인데 한국신학대학을 다닐 때
이미 깊은 신학사상에 몰두해 있었으며 신앙과 신학을 얘기할 때는 늘 정색을 하고 항상 진지하게 얘기하였다.
그는 사람을 잘 웃기는 재주가 있어서 전국연합회 주관 수련회(매년 여름 입석캠프장에서 열렸음)
기간중에는 인기를 독차지하곤 하였다.
경향신문과 기독교방송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한신대학원을 졸업했는데 기독교 방송국 빈방을 빌려
혼혈아를 위한 예배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장로회 특수목회자로 유명하게 되었고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포 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있다가 주모자로 수배되는 바람에
목회를 중단하고 스위스 바젤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시도 잘 써서 젊었을 때 청주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었는데 설교를 할 때는 평소와 달리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삼청교회에서 청년기를 보낸 그의 목회활동이나 가정생활은 독특하다.
항상 의와 불의에 대한 지적이 확실하고 소신껏 일하면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도
시내 어느 큰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다가도 교회에서 대접하는 점심식사를 사양하고
아내와 둘이서 손붙들고 걸으며 교보삘딩 뒤 간이분식집에서 싸구려 수제비를 사먹곤 한다.

나) 경복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4번타자 야구선수 김득중(목사)
고등학교 동창인 내 사촌 원우현(황숙희 권사의 장남, 현 온누리교회 장로)의 권유로 삼청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삼청교회와 안동교회중 어느 곳으로 정할까하고 망서리고 있을 때
청년들의 심방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우리는 모두 매일 만나다싶이 하면서 지냈는데 우리들 중 누가 주일 날 빠지면 의례
즉시 심방하여 못 나온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청와대 넘어가는 길 오른 쪽에 있던 국회 관사에 살았는데 열병으로 주사를 맞으며
힘들게 투병하고 있을 때 문병 온 우리들이 그러케 고마웠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삼청교회에 정착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에 학사편입했으며 미국 뜨루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신약학교수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그의 복음서 강좌는 지금까지 한국신약학계에서 독보적이다.
감신대를 졸업할 때 졸업논문을 영어로 제출한 최초의 졸업생이기도하다.
경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때 학교와 집에서는 당연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나 상과대학
또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갈 줄로 알고 있었는데 종교학과를 간다고 하니까
학교에서는 실망하고 아버지는 <저 녀석이 교회에 다니더니 미쳤다>고 꾸중을 하셨다고한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목사와 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니 학교선생님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못지 안는 큰 성취를 한 셈이다.

다) 연합회 활동은 1년에 한번씩 배화여고 배구코트장에서 열리는 배구대회가 있었고
매달 교회를 순회하면서 드리는 연합회 주관 순회헌신예배가 있었다.
배구대회가 있는 날은 모든 교인들이 같이 참가하는 축제의 마당이었다.
이 때는 각 교회가 야외예배 대신 이 날을 야외예배겸 교인들 친목행사로 이용하였는데
당시 지방회 청년부 간사로 있던 이재은 목사님이 각 교회 담임목사님들에게 부탁하여 그렇게 되도록 힘을 써 주시었다.
삼청교회청년부도 몇번 우승을 했었는데 조명래, 안계갑, 심재현 등 배구를 잘하는 진천출신들과
연세대 배구선수이었던 김실(이필연 권사님 차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삼청교회에는 수십명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주로 진천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진천출신 들은 정덕용장로가 인도해 왔으니 결국 정장로는 교회 중흥에 큰 이바지를 한셈이다.
저녁 시간 배구대회가 끝나고 시상식에서는 우승팀에게 우승컵이 수여되었는데
각 교회에서는 이것을 퍽 영예스러운 것으로 생각들 하였었다.


라) 서울 북지방 목사님들
청년부간사 담임목사 이재은 목사님, 중앙교회 박용익목사님, 계동교회 차현회목사님,
궁정교회 최요한목사님, 세검정교회 김봉록목사님, 인왕교회 유경식목사님, 평동교회 장기천목사님,
홍제교회 김기동목사님, 자교교회 김광우목사님, 종교교회 서형선부목사님 등은
북지방에 있는 청년들을 위하여서는 마치 공동으로 목회하시는 것처럼 만날 때마다 다정한 충고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 종로지방에 있는 60세 전후의 교인들은 다 그 당시 북지방 목사님들이 길러낸 <목양작품들>이다

59. 오후 2시에 부른 X-MAS 새벽송

오후 2시에 부른 X-MAS 새벽송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유엔 연합군은
<평택>을 기준으로 좌우전선을 연결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원>에서 서쪽으로 남하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병점>, <와우리>를 거쳐 <발안장터>를 지날 때에 보니
중공군이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와우리>에서 한 달간을 중공군점령지에 있던 우리는
<발안장터>로 옮기게 되었는데
<발안장터>는 유엔군과 공산군과의 전쟁터 중간이 되어 있었다.

<발안장터>에서 발이 묶인 우리는 1주일간을 꼼짝 못하고
우당탕거리는 탱크에서 쏘는 포소리를 들으며 지날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흰 치마를 어깨에 두른(멀리서 보면 흰 눈과 구분이 잘 안되었다)
공산군 두명이 꽁지가 빠지게 북쪽으로 떠난 반 나절 쯤 후
유엔군의 탱크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정찰하고 오더니
그 다음날 아침 긴 차량행열이 꼬리를 물면서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본 것은 바로
1.4.후퇴 후 다시 유엔군이 반격하는 장면을 본 것 이었다.

우리는 다시 전선에 묶일가봐
얼른 보따리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군 차량행열을 반대로 내려가며
유엔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길을 가다 말고 진군하는 유엔군 차량들을 보면서
연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면서 절을 하시었다

우리가 피란 간 곳은
셋째 숙모님의 친정인 화성군 우정면 호곡리 버마지란 곳으로
남양을 마주 바라다 보고 있는 <삼기>라는 바닷가 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가 굴과 조개를 줏어다 먹고
방궤를 잡아다 나문쟁이라고 하는 바닷가 어린 풀과
들에서 달래, 냉이, 맹이를 뜯어다 함께 넣고 국을 끓여 먹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전쟁의 피해는 없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그 곳에서 약 십리가 먼 거리에 있는 조암리 장터에 있는
<조암교회>(현재 삼청교회 출신 이종옥 목사 시무)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는데
조암리 입구 언덕바지에 있는 작은 집이 교회 예배처소 이었다.

교회의 간판은 물론 없고 마루에 가루연탄을 진흙에 이겨 넣고 때는 난로를 피워놓고
예배를 드리었다.

교회에는 아이 어른 모두 합쳐서 이십여명이 모ㅎ이었고
목사님 대신 남자 속장님 한 분이 예배를 인도하고 계시었다.

한 삼개월쯤 되었을 때 장로교 장로님 한분이 피난민으로 오시었는데
속장님이 하시던 설교와 장로님이 하시던 설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목사님 없이 계속 예배를 드리었는데
한 반년 쯤 되었을 때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은 특별히 조암장터의 큰집을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인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교인들이 모두모ㅎ여
그 집 마루는 말할 것도 없고 마당 가득히 교인들이 앉고 서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었다.

목사님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시작되자 마자
장내는 곧 울음바다가 되었고
예수님의 자녀로
새 힘을 얻고 힘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예배는 은혜스럽게 끝났다.

그해 여름과 가을이 다가고 겨울이 되었다.
12월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되어 서울에서 처럼 새벽송을 돌게 되었다.

그 때 그날은
눈이 오지 않고 비가 왔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새벽송을 돌았다.
사방 십리에 퍼져 있는 교인들 집을 돌며
차도 먹고 밤참을 먹다보니 날이 새었다.

그래도 우리는 새벽송을 계속 다녔다.
결국 마지막 간 집은 새벽송을 인도하시던 여선생님 댁이었는데
피곤하니 그냥들 가자고 하는 것을 우리는 끝까지 다하자고 하면서
대낮에 우산을 쓰고 새벽송을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새벽송이 끝나고 선생님댁에서 주는 점심을 먹으며
마루에 걸린 괘종시계를 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새벽송이
삼청교회에서 총리공관 새벽송을 마치고
황금색 응접실에서 중국차를 먹으며 지내던 것 보다
훨신 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로 기억되고 있다

58. 겨울에 여름이야기

겨울에 여름이야기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50년 3월1일
3.1.절 기념행사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있었다.
기념행사가 끝난 후 종로 화신 앞까지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3.1.절이라고 하여 <3 .1.="">이 선두에 서게 되었다. 
<3 .1.=""> 중에서도 북부단부(삼청동,팔판동)가 호르라기를 하나씩 입에 물고 
호르라기를 불면서 지휘자의 지휘봉 싸인에 맞추어 제일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머리에는 붉은 글씨로 3.1.정신이라고 쓴 흰띄를 두르고 3.1.운동가들의 고생을 생각하자며
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대열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종로 화신백화점 앞까지 이어졌었다.
가슴을 쫙 펴고 행렬의 제일 앞에 섰던 우리는 무슨 이상한 기분과 보람같은 것을 느꼈다.

1949년 여름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3 .1.="">에 입단했다. 
임광남 장로가 교회 큰길 건너편 골목 유명한 복주우물 근처에 살았던 팔판동 토박이이니까
어쩌면 이 일을 혹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매일 저녁 지금의 총리공관 앞에 있던 구미집에 방 하나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 모여서
군가를 배우고 마당에서 제식 교련도 하였다.
가끔 비상나팔을 불면서 비상소집 훈련도 했었다.
1950년 봄이 되면서 소년단 복장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 중 중대장 노릇을 하던 중학생이 하나 입고 왔는데 카키색 유니폼에 색실이 달린
호르라기를 달고 미군이 쓰는 것 같은 <할로모자>(챙없는 모자를 우리는 그러케 불렀다)를
쓴 모습이 퍽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공짜로 줄줄 알았던 유니폼이 적잖은 돈을 내야한다는 바람에 모두 실망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모두들 땀에 절어 옷을 짜서 입을 정도로 더운 여름이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터졌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큰소리 치던 정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가 버린 채 서울은 3일 만에 공산군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해 여름, 3.1소년단의 비상나팔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하기야 중대장으로 있던 예비역 소위도 숨어버렸을 때이니까 누가 나팔을 불라고
지시할 사람도 없었다.

곧 <팔판동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팔판동에서 제일 큰 집에 살던 30대의 젊은이가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여성동맹위원장>에는 우리 아래 집에 살던 산파가 취임하였다.
거의 매일 이런 저런 회의가 소집되었고 모든 집회는 금지되었다.

그날부터 삼청교회 예배가 중단되었다.
그 때 할머니(길영숙 권사)께서는 주일이 되면 한복을 깨끗이 갈아입고 전 처럼
성경과 찬송을 들고 예배당에 가시었다.
예배당에 가실 때마다 가족들과 여러차례 싱강이가 벌어졌다.
<집에서 예배드리세요>
<집에서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실거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시면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이 나쁘다고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막지마라. 사람이 한번 죽기밖에 더하겠니?>
할머니는 빈 예배당에서 혼자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읽고 하시면서 한 시간의 예배를
드리고 오곤 하시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찬송소리가 밖으로 들릴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곤 하였다.
어떤때는 교회에서 나오시다가 그들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뭐하다 나오시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나옵니다>
<할머니 예배를 금지시킨 것 모르시오?>
<압니다. 그러나 나는 예배를 중단 할 수가 없어요>
<할머니! 젊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으면 벌써 목에 칼들어갔오!!>

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며칠을 우당탕 거리면서 총알과 파편이 쌩쌩거리고 날아다니는 바람에 지하실에
몸을 피해야했던 우리는 중앙청에 태극기가 걸린 것을 보고서야 국군이 입성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석 달후 1월 4일 우리는 온 가족들이 보따리를 이고지고 피란 길에 올랐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또 1월4일이 다가온다.
산에서도,들에서도, 얘배당에서도, 기도원에서도 우리는 마음 껏 소리질러 기도 할 수 있고
내 힘껏 재주껏 소리질러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걱정이 되는 것은

을 보면서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 때와 입장이 달라진 것은, 내게는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삼청교회 교우들과
많은사랑하는 친구들과 이 땅에서 복받고 살아야 할 아들과 딸과 사위와 손자가 있기 때문이다.
모쪼록 주님의 은혜로 평안한 날들이 우리에게 계속 주어져야 할 터인데....................

57. 웅변대회

웅변대회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50년대 중반 삼청교회 삐율라회(중등부, 고등부, 청년부 연합기관)주관으로 웅변대회가 있었다.
작은 양철지붕의 판자집교회였으나 서울 시내 여러교회에 공문을 보내어 접수를 받은 결과
약 20여교회가 참가하였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그런 행사를 주관하였을까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회원들 중에는 중동고를 졸업하고 연대 철학과에 재학중이던
서성태(현재 그리스도교 목사)선배와 사촌 서성국, 후에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선린상고의 송한규, 서울고의 안병훈(현 조선일보 부사장), 성동고의 이구연, 용산고의 김해성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웅변으로 일가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서성태 선배는 박정희시대 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명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그럴 정도니 교회만 작았지 웅변대회를 주최할만큼 당당한 실력들이 있었다.
물론 1등은 삼청교회출신이었느데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안는다.
아마도 송한규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연사로 참가했던 이강소(현 도봉교회 장로)선배는 교회에서 제일 인기가 있던 수도여고 출신
조영자 선배와 연애결혼을 하게되었으니 결국 웅변대회가 연분을 맺어 준 셈이었다.

그 때 심사위원으로 오신 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총평을 해 주면서 한 사람씩 장단점과
고칠점을 얘기해 주었다.
내게는 그 때 얻은 상식이 직장생활 할 때와 권사로 설교를 하게 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송한규가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일이다.
그는 <이 주일의 노래>란 프로를 맡았었는데 여기서 이주일은 코미디언 이주일이 아니고
매 주일 한 곡씩 방송국에서 선정한 새 노래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방송이 시작되면 아나운서가 시그널 뮤직과 함께 <이주일의 노래>란 멘트가 나오는데
송한규는 웅변하듯 인토네이션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그것을 웅변을 하던 습관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그 후로는 웅변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1회로 끝나고 후로는 개최되지 안았다.
그보다 제일 큰 이유는 군사정부시절 말하는 것이 통제되는 사회였으니 누가 웅변을 좋아하드래도
감히 웅변대회를 열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토론하면서 생각을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
서로 자기의 소신과 주장을 펼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논리적으로 토론해 보는 것,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연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