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59. 오후 2시에 부른 X-MAS 새벽송

오후 2시에 부른 X-MAS 새벽송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유엔 연합군은
<평택>을 기준으로 좌우전선을 연결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원>에서 서쪽으로 남하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병점>, <와우리>를 거쳐 <발안장터>를 지날 때에 보니
중공군이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와우리>에서 한 달간을 중공군점령지에 있던 우리는
<발안장터>로 옮기게 되었는데
<발안장터>는 유엔군과 공산군과의 전쟁터 중간이 되어 있었다.

<발안장터>에서 발이 묶인 우리는 1주일간을 꼼짝 못하고
우당탕거리는 탱크에서 쏘는 포소리를 들으며 지날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흰 치마를 어깨에 두른(멀리서 보면 흰 눈과 구분이 잘 안되었다)
공산군 두명이 꽁지가 빠지게 북쪽으로 떠난 반 나절 쯤 후
유엔군의 탱크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정찰하고 오더니
그 다음날 아침 긴 차량행열이 꼬리를 물면서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본 것은 바로
1.4.후퇴 후 다시 유엔군이 반격하는 장면을 본 것 이었다.

우리는 다시 전선에 묶일가봐
얼른 보따리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군 차량행열을 반대로 내려가며
유엔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길을 가다 말고 진군하는 유엔군 차량들을 보면서
연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면서 절을 하시었다

우리가 피란 간 곳은
셋째 숙모님의 친정인 화성군 우정면 호곡리 버마지란 곳으로
남양을 마주 바라다 보고 있는 <삼기>라는 바닷가 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가 굴과 조개를 줏어다 먹고
방궤를 잡아다 나문쟁이라고 하는 바닷가 어린 풀과
들에서 달래, 냉이, 맹이를 뜯어다 함께 넣고 국을 끓여 먹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전쟁의 피해는 없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그 곳에서 약 십리가 먼 거리에 있는 조암리 장터에 있는
<조암교회>(현재 삼청교회 출신 이종옥 목사 시무)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는데
조암리 입구 언덕바지에 있는 작은 집이 교회 예배처소 이었다.

교회의 간판은 물론 없고 마루에 가루연탄을 진흙에 이겨 넣고 때는 난로를 피워놓고
예배를 드리었다.

교회에는 아이 어른 모두 합쳐서 이십여명이 모ㅎ이었고
목사님 대신 남자 속장님 한 분이 예배를 인도하고 계시었다.

한 삼개월쯤 되었을 때 장로교 장로님 한분이 피난민으로 오시었는데
속장님이 하시던 설교와 장로님이 하시던 설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목사님 없이 계속 예배를 드리었는데
한 반년 쯤 되었을 때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은 특별히 조암장터의 큰집을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인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교인들이 모두모ㅎ여
그 집 마루는 말할 것도 없고 마당 가득히 교인들이 앉고 서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었다.

목사님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시작되자 마자
장내는 곧 울음바다가 되었고
예수님의 자녀로
새 힘을 얻고 힘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예배는 은혜스럽게 끝났다.

그해 여름과 가을이 다가고 겨울이 되었다.
12월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되어 서울에서 처럼 새벽송을 돌게 되었다.

그 때 그날은
눈이 오지 않고 비가 왔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새벽송을 돌았다.
사방 십리에 퍼져 있는 교인들 집을 돌며
차도 먹고 밤참을 먹다보니 날이 새었다.

그래도 우리는 새벽송을 계속 다녔다.
결국 마지막 간 집은 새벽송을 인도하시던 여선생님 댁이었는데
피곤하니 그냥들 가자고 하는 것을 우리는 끝까지 다하자고 하면서
대낮에 우산을 쓰고 새벽송을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새벽송이 끝나고 선생님댁에서 주는 점심을 먹으며
마루에 걸린 괘종시계를 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새벽송이
삼청교회에서 총리공관 새벽송을 마치고
황금색 응접실에서 중국차를 먹으며 지내던 것 보다
훨신 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