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천 목사님
90 여년의 삼청교회 역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분이 박웅천 목사님이시다.
집없는 은퇴 목사님의 숙소인 주안 감리교 원로원의 총무를 지내신
박창국 목사님의 장남이시다.
아버님이 만주와 평양 등지에서 목회하실 때 유소년기를 보내신 박웅천 목사님은
철저한 독립지사의 아들로 교육되었으며
실수로 집에서 모르는 결에 일본어를 사용했다가는
아버지에게 반 죽도록 매를 맞았다고 한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신 재학중 서울 수표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전도사로 목회실습을 하셨고
군목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였다.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때는 연대장이
"목사님!
정말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하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할터이니
목사님은 전투에 이기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초 저녁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면서 계속되다가
새벽녘에 들리는
"만세~~ 만세~~"
소리를 듣고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유명한 김형욱 정보부장은 당시 같은 연대의 작전과장이었다고 한다.
주월사령부 군종참모로 있을 때 권총을 차고 다니는 군목들에게
총을 끌르라고 지시하면서 목사는 군복을 입었어도 성직자 이므로
아무리 위험에 처하여도 총을 쏘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첬다고 한다.
법과 대학을 나오고 감신대를 나온 박웅천 목사님은
항상 원칙이 뚜렸하였다.
지방회나 년회를 할 때에는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는 위원회의 책임을 맡곤하였다.
한참 왈가왈부 하다가도
박웅천 목사님이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고 나면
더 이상 논란들이 멈추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박웅천 목사님은 분당이 있고 편싸움이 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셨다.
감리교단이 두번째 다시 갈라져 싸울 때
삼청교회는 무소속으로 어느 편에도 가담치 않았다.
그리고 지방회에도 년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교단이 통합될 때까지 기다렸다.
감리교 본부에서 일하시는 어떤 목사님은
박목사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셨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리교회에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분의 이력서는 석 줄 밖에 없어요.
1.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2. 육군군목 제대
3. 삼청감리교회 목사"
"박웅천 목사님은 모든 목회의 표본이십니다"
서울 문래동교회
이기덕 원로목사님은 이렇게 말해 주셨다.
"그분은 감리교회의 거물입니다.
교단의 직책을 맡은 일이 없고
부흥회를 다닌 일도 없고
책을 써 낸 적도 없지만
모든 후배 목사들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수유리에 있는 박웅천 목사님을 찾아 뵈었을 때
근황을 말씀해 주셨다.
"요즘은 평신도 훈련을 하고 있어.
담임목사가 이취임을 할 때면
원로목사라고 인사를 오는데
당신은 내 담임목사이고 나는 그 교회 교인이니
식사는 내가 대접해야한다고 하며
식사값을 내가 내곤 했지."
"요즘 평안하세요?"
"처음에는 좀 이상하더라구.
오는 전화도 없고 전화 할데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온 갖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니까 살것 같아...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전혀 새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야."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안할래~
아 나도 이제는 마누라하고 여생을 보내야지
또 그런 스트레스르를 다시 왜 받아.
그냥 쉬게 내버려 두라구...."
부목사는 고사하고 전도사나 사무원 한 사람도 없이 30년을 혼자 견디신
박웅천 목사님의 헌신적인 목회는
삼청교회를 오늘의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봉헌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