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76. 한재현 선생님
2005.11.6.
1953년에서 1957년 사이에 삼청교회 초대성가대 지휘자였던
한재현 선생님이 원로목사님이 되어 돌아왔다.
한재현 선생님은 감신대를 중퇴하고 있다가
최준호 목사님 시절 중간 쯔음에 교회성가대 지휘자로 오신 분이다.
그 이전에는 가끔 설교 전 특별찬송이 있기는 하였지만
성가대라는 것이 생긴 것은 한재현 선생님이 지휘자로 오면서 부터였다.
중키에 꼽슬머리인 미남형의 한재현 선생님은
옥인동의 전통 한옥에 살았는데 부모님과 위로 형님이 한분 계셨는데
감신대를 왜 중퇴하였는지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또 스스로 말한 적도 없다.
우리보다 10년 년상이니까 금년 76세이시다.
지금이나 그 때나 목회가 쉬울리가 없다.
신앙적인 자기완성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소명이 확실하여야하며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가 있어야한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어려운 목회환경이었다.
목회지는 구할 수 있으나
보수가 거의 없는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목회는 곧 가난한 삶이라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라
그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재현 선생님은 음악목사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음악목사 제도가 있었다면 감신대를 마치고
음악목사가 되었을 것이다.
눈은 늘 밝고 파란 색을 띄고 있었으며
미소를 띈 얼굴은 늘 불그레한 빛이 있었다.
정열적인 모습의 한재현 선생님은
마치 영화배우와 같은 인기가 있었고 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 때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를 합하여 『삐율라회』라는 이름으로
통합 운영된 적이 있었다.
『삐율라회』총회를 할 때면 약 70여명의 회원들이 앉아서 회의를 하였다.
우리는
안병훈(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재형(용의눈물 PD), 송한규(아나운서)등과 함께 중고등부였고
한재현 선생님은
홍성배 선생님(원로목사), 서성태 선생님(원로목사), 김명환 선생님(김동성 권사 삼촌)등과 함께 청년부였다.
『삐율라회』에서는 가끔 신앙토론회를 하였다.
토론회는 주로 쳥년부에서 리드를 하였는데
조금도 양보를 하지않고 열띤 토론들을 하였다.
한재현 선생님은 그런 토론회가 있을 때는
토론회의 주멤버였다.
서성태 선샌님은 연대 철학과 였고 김명환 선생님은 연대정외과 였으며
안병훈의 누님 안병숙은 이대 정외과 등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토론은 아주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 시간씩 길게 진행되던 토론회는 아무도 지루하게 생각하지않고
흥미있게 들으며 참가를 하였었다.
한재현 선생님은 교회를 떠난지 얼마 후
고등학교를 갖졸업한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는 배화여고 정문 근처에서
부부가 작은 문방구를 운영하였다.
우리가 신혼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동전을 헤아리며 하루 장사한 것을
결산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삶의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세검정으로 가족 나드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재현 선생님은 성경속에 있는 유토피아를
현재의 삶속에서 찾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년 소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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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현 선생님은 오관석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서울중앙침례교회의
부목으로 시무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지금은 원로목사가 되시었다.
같이 예배를 드린 한재현 원로목사님은 축도를 해주시었다.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기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실 지어다....
예배가 끝난 후 장로교 보수교단 출신의 어떤 교인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어떻게 하나님에게 [~지어다] 명령어를 사용 할 수 있읍니까
이 축도 [~지어다] 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예언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하는 것이지
인간의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다는 의견과
오래동안 장로교 교파간의 싸움이 있어 왔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독특한 자기의 길을 가던
꼽술머리 미남의 한재현 선생님...
지금은 다시 고집스런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자기 소신껏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