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 목사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우리가 목사님을 뵈오러 교회를 찾아가면 늘 문이 열려 있었고 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고는
사모님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어서와요>
하고 나오시며 방으로 맞아주셨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누가 왔어?>
하면서 서재에서 책을 보시던 목사님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서재에 안 계실 때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다가 나오시었다.
목사님은 등이 거북이 등이라고들 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책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시느라고 등이 구부러저서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재은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 불타버린 교회의 폐허 위에 천막을 치기 위해 터를 닦을 때,
러닝 셔츠 차림으로 삽을 들고 땀을 흘리며 일하시던 모습은 모든 교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목사님은 설교를 하고 심방 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나 해주시는 거룩한 분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분이 우리와 함께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교회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와 함께 우리의 방법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격적이었다.
앞장서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에서 교인들은 새 힘을 얻게 되었고
천막을 친지 얼마 안되어 새 교회를 짓게 되었으며 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었고
교회를 통하여 많은 일군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항상 힘차고 자신 있게 일하시었다.
우리는 그 힘과 용기를 어떻게 갖게 되신 것인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목사님은 중학교(6.25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지 않고
6학년까지 있었음) 대대장이셨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 대대장이라고 하면 조회 때 앞에서 차려, 경례를 큰소리로 외치는
덩치가 큰 학생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6.25 이전의 학교 대대장은 격이 지금보다 높았다.
군대 편제를 갖춘 학도호국단의 지휘자로 유사시 군대의 대대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그런 조직의 지휘자이었다.
목사님께서는 학교 소년단원(Boyscout) 30여명을 인솔하고 개성서 피난을 나오셨다고 한다.
30여명의 단원들을 인솔하고 부산까지 내려가신 목사님께서는 은영극장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봉사를 하면서 단원들의 숙식을 해결하셨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신학을 공부하시고 군목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목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시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행정에 있어서 매우 조직적이시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기관과 속회와 선교회에 소속되게 하시었다.
그래서 누구나 교회에 나오면 해야할 일과 직책이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교회 뜰이나 주택에 모여
우리가 좋아하는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그때의 시간들이 자연스러운 카운슬링이 되었고 각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요한 시간들이 되었으며
후에 청년속회로 발전하게된 기초가 되었다.
그 때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다양하였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철학에서부터 국가관, 시국관, 동양철학, 서양철학,
심지어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의 문제도 다루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더라도 누구의 말이든지 진지하게 들어 주셨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항상 그 평소 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우리가 평소 토론하던 문제들을 성경을 통하여 해답을 주곤 하시었다.
그 때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가난이나 무식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없었고 모두 교회를 통하여
사랑과 용기와 보람을 느끼고 살았다.
우리는 목사님과 함께 하던 그 시절을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있다.
그때의 청년들은 지금 모두 60이 넘었거나 가까이된 사람들이지만 그 즐거웠던 낙원을 생각하며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
그 때의 청년들은 목사와 장로와 권사들이 되었지만 지금도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재은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실까>
생각해 보며 힘을 얻고 있다.
언젠가는 수요예배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 위경련이 일어나셨다. 배를 웅켜 잡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계셨다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온 교인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다.
교회에서 약 5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병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리로 모시고 갈 생각은 않고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때 침을 잘 노으시던 권사 님이 오시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요 예배에 참석하는 남자어른이 별로 없던 때라
모두 권사님만 쳐다보고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권사 님은 목사님을 진맥하시더니 장경련이라고 하면서 시간이 되었으니 먼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침을 놔드려야겠다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권사 님이 대신 인도하신 수요 예배는 30분만에 끝났다.
예배가 끝나자 권사 님이 침통을 꺼내어 목사님의 이곳 저곳에 침을 찌르더니
얼마 후 목사님의 통증이 멈추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 일로 두고두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재은 목사님에게 큰 빗을 진 사람의 심정으로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아파서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으면
목사님이 예배부터 드리고 천천히 권사님을 찾아 침이나 놔주도록 하셨을까?>
목사님께서는 분명 얼른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 가셨을 것이다.
<침을 먼저 놓고 나서 목사님이 안정되시는 것을 보고
시간이 좀 늦게 예배를 드리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셨을까?>
<목사님의 병원비를 교회재정에서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하였나?>
<예배를 먼저 드리다가 그 사이 목사님이 잘못되셨으면 어쩔 번하였나!>
우리들은 전형적인 바리새인 이었다.
교인들은 그 때 일을 늘 부끄러워하였고 자랑하던 신앙에서 겸손해지는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사님은 교회음악을 사랑하시었다.
교회가 작을 때에도 늘 성가대와 특별 찬송 순서가 있었고 심지어 다른 곳으로 설교를 하러 가실 때에도
설교전에는 꼭 특별찬송 순서가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종로경찰서 경목이셨기 때문에 매달 유치장 설교를 하시었는데
가끔 목사님의 설교 전에 나는 특별찬송을 했었다.
1960년대 초 어느 겨울이었다.
목사님께서 온양 지방 현충사 부근 어느 교회에서 자비량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가 있었는데
목사님의 설교 전에 특별 찬양을 한 적이 있었다.
온양역에 마중 나오신 전도사님을 따라 하얀 눈길을 걸으며 시골교회까지 가던 일,
새벽기도와 오전성경공부와 저녁예배 시간에 특별 찬송을 하던 일,
냉방이었던 담임 전도사님의 숙소에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일,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을 하던
동화 속에서와 같은 미니 성가대(남녀8명)의 아름다운 모습 등은 잊을 수 없는 목사님과의 추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한 것이어서 우리교회에서 교사와 학생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면서
신학교와 음대를 다니던 <베토벤> 김규현 교수가 바로 그 교회 출신 인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이재은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받은 은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청교회 봉사로 보은을 한셈이다.
그는 현재 한국 음악비평가회회장으로 있으면서 음악저널 편집장이고 여러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남서울교회 본성가대 지휘자로 있으면서 한국찬송가를 많이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지금도 아무리 바쁜중이라도 김완호 목사님이나 내가 전화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와서 옛정을 나누곤한다.
생각해보면,
목사님께서는 늘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목사님의 설교말씀 제목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생활로 보여주신 그 모습들은 어느 설교 말씀보다도 강하게 내 심령에 들려오는 로고스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