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112. 쏠라피데와 파르헤지아
기독교는 캐논인 성서에 대한 쏠라 피데(오직 믿음)로
개인의 신앙과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푸코의 주체적 태도/파르헤지아는
우리 기독교의 고백과는 대립관계에 있는 말이다.
파르헤지아는 라틴어의 libertas인데
말의 자유, 솔직히 말하기,
상대방을 동요시키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하며
실존의 스승의 말이 갖는 태도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실존의 스승이란
현명하게 처신하는 법을
배우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는 賢者(현자)를 말한다.
미셸 푸고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인
『진실의 용기』에 보면
푸코는 감옥정보그룹(GIP)을 만들고 이 모임을 통하여
소외된 감옥 속에서 일어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하여
일반사회에 알려지게 하는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의 용기이며
파르헤지아의 어원이다.
지식인인 푸코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적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발생되고 있던 바를 파악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
우리는 가끔 기독교 자체 속에서
파르헤지아를 보고 있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처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은 좋지만
그 결과를 특정지으려는 것은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방법은 그 답이 하나일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의 방법은 두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조직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쁜 일들은
반드시 알려지고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처리방법은 상식과 다르게 결정될 수가 있다.
모든 죄인은 벌을 받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것이 구약이고 하나님의 법이다.
비록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그 보응을 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교회의 죄인에게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회개와 용서라는 아가페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였는지 누가 알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과 죄인과의 만남 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잘못을 시정할 때에도
파르헤지아가 아닌 쏠라 피데(오직 믿음)로만 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죄을 지은 사람이 우리들 앞에서
거짓으로 회개한 척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와 우리 모두는
거짓 회개에는 용서도 물론 없고
영원한 삶도 없으며 영원한 저주 속에 산다는 것이
우리가 믿고 알고 있는 쏠라피데이다.
믿음의 대상도
회개의 대상도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대상도
오직 한분 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