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1970년에 이르는 동안
영등포를 위시한 전국의 공업단지에서는
보세가공이 유행하였습니다.
보세가공이란
전량 수출을 목적으로 원자재를 수입하여
그것이 수출될 때까지 관세납부를 유보해주는 제도입니다.
일반수출품은 국내에서 기획하고 만들어서
들어간 원가에 일정한 이익을 붙여서 수출할 수가 있지만
보세가공은 결정되어 있는 수출가격에
수입원자재 값을 빼고 나면 국내에서 쓸 수 있는 돈은
제한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출가격에서 수입원자재 값을 뺀
국내에서 쓸 수 있는 돈이 50%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데
그 당시의 보세가공품은 30%도 채 안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10%로 포장비를 빼고 10%로 투자한 돈의 이자를 빼면
나머지 10%로 인건비를 맞추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나마 작업이 부진하여 예정보다 생산이 늦어지면
이자를 감당 못하여 적자수출을 하기가 십상이었습니다.
영등포에서 제일 큰 회사였던 내가 다니던 회사는
결국 그 이자를 감당치 못하고 불실기업으로 정리당하고 말았습니다.
쌀 한가마에 3,500원~4,000원 하던 시절
공장 여성 종업원 초임이 일당 60원 기준일 때
한달 수입이 잔업수당을 포함하여
2,000원~2,500원이 고작이었습니다.
일당 40원~50원이
흔하던 시절입니다.
정부에서는
왜 그런 보세가공을 장려하고 있었을까
비록 아주 작은 임금일지라도 가공을 위한 사람들의 일자리가 생기고
수출포장 산업이 생기며
항만까지의 국내 운송 일거리가 생기고
수출입을 위한 창고업과 선박 운송업이 추가로 발생하여
많은 일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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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환경 속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공장에는 약 300명의 종업원이 있었고
나는 150명의 여성 종업원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절반 가량이다가
월급을 타기 일주일 전이 되면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은
⅓도 되지 않았으며 가끔 작업하다가 졸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몸이 아파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가
쌀이 떨어져 며칠 굶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비로 공장 앞 가게에서 빵을 몽땅 사다가
밥을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며칠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여의도 판자집에서 자취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수출일정 때문에 일요일도 출근하여 일할 때가 많았는데
도시산업 선교회 조지송 목사님을 청하여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조지송 목사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공장 저 공장을
담임목사님이 교인들을 심방하시듯 다니며 살피셨고
공장 책임자들과 공장의 형편과
종업원들의 대우등을 물으시고 가시곤 하셨습니다.
혹 낮시간에 외부에서 길을 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조지송 목사님과 만나면
가시던 길을 멈추고 서서 길가에서
공장 종업원들과 그 미래에 대하여 한시간씩 이야기를 하곤 하셨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서울의 여러 남녀 대학생들이
산업의 현장을 체험하기 위하여 한 공장에 두명씩 배치되어
한 달 동안 공장체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도시산업 선교회 간사이시던 오철호 목사님의 인도로
문래동 작은 여관에 묵으면서
아침에는 공장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여서는 그날 공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나눔을 가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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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오철호 목사님은 미국으로 가셨다는 말을 들었고
조지송 목사님은 도시산업선교회를 계속 이끄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퇴직하고 직업을 바꾼 후
조지송 목사님을 만나뵌 일은 없습니다.
군사정부시절
도시산업선교회 일로 많은 옥고를 치르신 것을
신문지상을 통하여 알게되었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를 떠 올릴 때 마다
공장 이곳저곳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헌금 수입도 없고(그때 환경이 그렇습니다)
공장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여도 드리는 사례금도 없고
그냥 광야와 같은 공장의 숲속에서
젊음을 불태우시던 조지송 목사님이
지금은 아마도 연세가 80이 넘으셨을 터인데
아직 살아계신지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광야와 같은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도대체
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도시산업선교회 멤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마다
연약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고 공장을 심방하시던
조지송 목사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분이 혹
우리와 함께 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기도를 많이 하셔서인지
꾸부정한 허리에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푸른 색이 도는 늘 맑은 눈동자를 갖고 계셨으며
우뚝 솟은 콧날하며
잔잔한 미소......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