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년의 삼청교회 역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분이 박웅천 원로 목사님이십니다.
전반기 48년 동안 26분의 목사님이 계셨고
후반기 50년 동안 3분의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중 30년이 박웅천 목사님이 목회하신 기간입니다.
국방부 군종실장을 역임하시고
주월사령부 군종실장으로 계시다가
제대하면서 바로 삼청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제대할 때 주월사령관이
오래동안 군에서 고생을 하셨으니
세계일주를 한 번 하시고 들어가시라고 하는 것을
목사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세계일주는 나중에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사양하고
바로 귀국하여 그 다음 주에 취임하셨습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집없는 은퇴 목사님의 숙소인 주안 감리교 원로원의 총무를 지내신
박창국 목사님의 장남이십니다.
아버님이 만주와 평양 등지에서 목회하실 때 유소년기를 보내신 박웅천 목사님은
철저한 독립지사의 아들로 교육되었으며
실수로 집에서 모르는 결에 일본어를 사용했다가는
아버지에게 반 죽도록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삼청교회에 계신 동안 일본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에도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철저하게 일본어를 한마디도 안하고
돌아오신 분입니다.
일본 공항 직원들이 나이로 보아 일본어를 알 것 같아서
니홍고오 와까리 마스까? 하면 일부러 영어로
I can not! 하면서 지나갔다고 합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신 재학중 서울 수표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전도사로 목회실습을 하셨고
군목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셨습니다.
전투가 끝나면 군종병들과 함께
포탄에 맞아 흩으러진 시신을 거두어 수습했다고 합니다.
김씨 성의 머리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몸통에다
임자를 알수 없는 팔과 다리를 짝을 맞추어
입관을 하였다고 합니다.
전쟁 동안
수많은 주검들을 보았고
직접 처리하셨다고 합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그 끔찍함을 기억하시기 싫어서인지
30년동안 함께 하면서도 전쟁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궁금해서 혹 물으면
마지 못해서
추억을 하듯 먼 산을 바라보는 눈동자로
옛 일들을 회상하곤 하셨습니다.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때는 연대장이
"목사님!
정말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하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할터이니
목사님은 전투에 이기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면서 계속되다가
새벽녘에 들리는
"만세~~ 만세~~"
소리를 듣고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유명한 김형욱 정보부장은 당시 같은 연대의 작전과장이었다고 합니다.
주월사령부 군종참모로 있을 때 권총을 차고 다니는 군목들에게
총을 끌르라고 지시하면서 목사는 군복을 입었어도 성직자 이므로
아무리 위험에 처하여도 총을 쏘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웅천 목사님의 설교와 목회는
사랑과 평화입니다.
목사님의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평안을 누리며 살라는 요지의 말씀이었고
신앙생활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모든 교인들이 가정에서
사랑을 나누며 화목하게 사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살피러
많은 심방을 하셨습니다.
봄 가을 대심방 외에도 일년에 한 3~4회 정도
목사님의 수시 심방이 있었습니다.
급히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마취에서 깨어날 때에는 항상 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법과 대학을 나오고 감신대를 나온 박웅천 목사님은
항상 원칙이 뚜렸하였습니다.
지방회나 년회를 할 때에는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는 위원회의 책임을 맡곤하였습니다.
한참 왈가왈부 하다가도
박웅천 목사님이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고 나면
더 이상 논란들이 멈추곤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박웅천 목사님은 분당이 있고 편싸움이 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셨습니다.
감리교단이 두번째 다시 갈라져 싸울 때
삼청교회는 무소속으로 어느 편에도 가담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방회에도 년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교단이 통합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감리교 본부에서 일하시던 어떤 목사님은
박목사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리교회에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분의 이력서는 석 줄 밖에 없어요.
1.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2. 육군군목 제대
3. 삼청감리교회 목사"
"박웅천 목사님은 모든 목회의 표본이십니다"
서울 문래동교회
이기덕 원로목사님은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감리교회의 거물입니다.
교단의 직책을 맡은 일이 없고
부흥회를 다닌 일도 없고
책을 써 낸 적도 없지만
모든 후배 목사들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은퇴를 하신 후
수유리에 있는 박웅천 목사님을 찾아 뵈었을 때
근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즘은 평신도 훈련을 하고 있어.
이제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이 되었지....
담임목사가 이취임을 할 때면
원로목사라고 인사를 오는데
당신은 내 담임목사이고 나는 그 교회 교인이니
식사는 내가 대접해야한다고 하며
식사값을 내가 내곤 했지."
"요즘 평안하세요?"
"처음에는 좀 이상하더라구...
오는 전화도 없고 전화 할데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온 갖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니까 살것 같아...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전혀 새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야."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안할래~
아 나도 이제는 마누라하고 여생을 보내야지
또 그런 스트레스르를 다시 왜 받아.
그냥 쉬게 내버려 두라구...."
부목사는 고사하고 전도사나 사무원 한 사람도 없이 30년을 혼자 견디신
박웅천 목사님의 헌신적인 목회는
삼청교회를 오늘의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봉헌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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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천 목사님의 열정에 모든 교우들이 일심으로 순종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은퇴하시기 직전
지하 3층과 지상 3층으로 된
현재의 새 교회건물을 봉헌하셨습니다.
교회 밖에는 대단한 카리스마로 독재를 하는 목사님으로 알려졌으나
어떤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혼자 결심을 하지 않고
장로님들에게 결정을 하게하고
자신은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면서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서로 미루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였습니다.
일반 목회와 행정은 모두 일임해 줄것을 원하셨고
교단이 분리되었을 때에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교회의 건축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하는
교회의 기본적인 중요사항들은
장로님들이 결정을 해달라고 하셨었습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우이감리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며
지금까지 꼭 한 번 삼청교회를 방문하셔서 설교를 하셨을 뿐입니다.
평생을 목회에 전념하신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과 두 따님과 아드님
주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게
여생을 살아가시기를 온 삼청교회 교우들과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