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8일 월요일

48. 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기쁨

60년 전
교회학교 어린이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맘에 있는 하늘 맑고도 밝은 해가 비치네
발자취를 따라가세 활발스러웁게
발자취를 따라가세 노래하며 즐겁게

그래서 모든 아이들은
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보니
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은
나의 욕망을 성취하는 길이 아니고
주의 뜻을 이루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주님이 가셨던 길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어려운 고난을 잘 참고 견딘 자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쁨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 어떤 환경에서도
참으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성공적으로 따라가기 위하여
주님께 기도를 하면서 여쭈어 봅니다.

그러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47.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지난 주간 홍천 만리현성결교회 수양관에서
서울엠마오가는길 13기(남자)가 있었습니다.

시작하는 날 늦은 오후
우리는 준비기도회로 모였습니다.

기도회는 이번 기의 호스트 역을 맡은
춘천남지방 허태수 감리사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의 목사님은 서두를 이렇게 꺼내었습니다.

나는 지금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젊은 교인을 심방하고 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며 내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좀 빨리 죽게 해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이 사람아
이번 주간은 내가 너무 바뻐요
그러니 이번 주간에는 죽지말아
견뎌봐

알았어요 목사님
힘들지만 버텨보겠습니다.

허태수 목사님은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었습니다.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는 교인을 위하여
내가 해 줄수 있는 것이 없군요
그는 목사인 나에게 기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그에게 큰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 이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불쌍한 우리 교인을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우리 주님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손을 놓고 있었군요.
우리 주님께 회개를 하면서 이번 13기를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엉엉 울면서
그 날을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우리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허태수 목사님은 그날 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있는 원두막 같은 곳에서 주무셨습니다.

아마
철야기도를 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

오늘 나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한 친구를 심방하고 왔습니다.

5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이제는 암에서 해방된 줄 알고
본인과 가족이 모두 평안을 되찾으려 할 즈음
암이 전신에 급속히 퍼진 것을 뒤늦게 발견하였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이제는 오늘 내일 죽음이 임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말이었습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리고 본인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친구들을 많이 돕기로 소문난 친구이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악하게 한 일이 없이
열심히 살아온 친구입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새삼스리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친구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우리 친구가 세상을 떠날 때
주님 나라에서 안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친구의 부인이 말해주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이 오셔서 마지막 기도를 해주셨고
본인도 신앙고백을 하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위안을 삼으며
병실을 빠져나왔습니다.
.....................................................................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46. 최권능 목사님 이야기

셋째 사위 윤찬노 집사가 전해준 최권능 목사님 이야기
..............................................................................

1. 사위가 된 경위

오래 전에 금호제일교회 경비원들 중에
윤찬노 집사라는 70대 후반의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황해도 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왜정시대에 도시의 모든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바람에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믿음 좋은 청년을 구하는
최권능 목사님에게 추천되어
뜻밖에 평양에 계신 유명한 최권능 목사님의
셋째 사위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장인이신 최권능 목사님의 이야기 몇가지를 들려주었습니다.


2. 자다가 봉창 열고 소리 지르기

옛날 한식 집들은 담장이 없고 문 옆에 바로 방이 있었습니다.
들창문도 지금처럼 바퀴가 달린 유리문이 아니고
방문과 같이 양옆으로 잡아다니게 되어있는 문이 었습니다.

두꺼운 한지로 몇겹을 발라 방한을 하였으며
일상 사용하는 문 겉에 덛분이라고 하여
더 두껍게 만든 문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닫지 않고
열어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들창문은 봉창이라고 하였습니다.
방문과 봉창은 모두 안에서 밖으로 열게 되어있는데
방으로 들어갈 때는 방문을 밖앝쪽으로 열고 들어가고
방에서 봉창을 열 때는 안에서 밖앝쪽으로 문을 열게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밤이 새도록 불이켜져 있어서
시간가는 것을 모르고 살 수 있었지만
전기가 없던 시절의 밤은 초저녁부터 어두워
이튿날 날이 샐때까지 긴긴 밤을 어두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도 많이 살지 않던 옛날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은
남자와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무서운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방에 불을 끄고 누워있다가도
봉창밖에 사람지나가는 발자국소리가 나면
벼란간 봉창을 열어제치면서

예수!! 천당!!

하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답니다.
그러면 조심조심 봉창 앞을 걸어가던 사람은
기겁을 하고 놀라 자빠지면서 욕을 하였다고 합니다.


3. 임신한 암소의 낙태

한번은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어느 마을 어귀 방아간에서
연자맷돌을 돌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분에게 전도를 하려고
그 곁을 지나면서

예수 !! 천당!!
하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다고 합니다.

그때 연자맷돌을 돌리던 암소가 임신중이었는데
벼란간 벽력같이 소리지르는 최목사님의 소리에 놀라
펄쩍 거리고 뛰다가 그만 낙태를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4. 나무꾼에게 꾀를 내어 전도

한번은 어느 산길을 가는 중에
산에서 나무를 하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 나무꾼에게 전도하고싶은 마음이 생겨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70이 넘은 고령의 목사님은 숨이 차서
그곳까지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꾀를 내었습니다.
벼란간 배를 움켜잡고 구르며

아이고 배야 ! 아이고 배야 !
하면서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나무꾼은 그 소리를 듣고 내려와
최목사님을 붙들고
어디가 아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그 나무꾼의 바지가랭이를 붙들고
예수 믿고 천당가세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이가 없는 나무꾼은 목사님을 보면서
에이 참 ....
혀를 차면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잡은 바지를 놓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야 놓아준다고 하였습니다.

바지를 놓아라
예수 믿는다고 하지 않으면 못놓겠다

화가 치민 나무꾼은 노인을 몇 대 주어지르고
떠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바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화가 나면 여기서 나를 때려 죽여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만 하세요

옥신각신하던 나무꾼은 꼼짝 못하고 예수를 믿기로 하고
풀려나 산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어느 곳에 집회를 하러 갔다가 그 교회 교인댁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밥상이 들어왔을 때 그 교인은 목사님을 보고 웃으면서

목사님
저를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기억이 잘 나지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니까

목사님
전에 어느 산속에서 전도를 하시다가
나무꾼에게 봉변을 당한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제가 바로 그 때의 나무꾼입니다.

목사님과 헤어진 후
바지를 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청하시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할 수 없이 믿기 시작하여 지금은 이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영생을 얻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5. 회개

최권능 목사님도 윤찬노 집사님도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언제 부르실 것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일을 보고할 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회개하면서
또 다시 결심을 해보곤 합니다.

45. 예배를 금지시켰던 사람들

6월이면 생각나는 예배를 금지시켰던 사람들
........................................................................
한국의 최근세사 속에서
예배를 못드리게 금지시켰던 일이 세번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한
기독교 박해때문이었고

두번째는 6.25 전쟁중
공산군 점령하에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던
3개월 동안이었으며

세번째는 군사혁명 이후 반정부 집회가 심할 때
계엄령 하에서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
첫번째 이야기는
수많은 순교자를 낸 천주교의 박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두번째와 세번째는 제가 직접 겪었던 일들입니다.

6.25 전쟁이 시작되자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모든 집회를 금지시켰습니다.
서울의 모든 교회는 문을 닫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할머니는 여전히 주일이면 옷을 갈아입고
성경과 찬송을 들고 교회에 나아가 혼자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가족들은 극구 말리었습니다.

집에서 예배를 드리어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터이니
집에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막무가내로 교회에 가서 혼자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가
내무서원에게 들키었습니다.

할머니 ! 무엇하고 나오시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옵니다.

할머니 ! 예배를 금지시킨것을 모르시오
젊은이 같으면 벌써 목에 칼 들어 갔오
하지 마시오

얼마 지났을 때
효자동 종점을 지나다가 형과 동생을 삼고 지내던
궁정교회 정양은 형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을 따라서 어디를 가던 중인데 내 손을 잡아끌며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조심스레 대문을 닫아걸고 중문도 꼭 닫은 후
그 집에 있던 분과 5~6명이서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금요일이었고 오후 2시쯔음 되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속회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모두 유사시에는 즉시 일어서서 나갈 양으로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속장님이 예배를 인도하시었습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짧은 설교를 하셨으며
간절하고 긴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습니다.

중학교 4학년에 다니던 정양은 형을 어느곳에 피란 보내며
부모님과 함께 마지막 예배를 드린것 입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후 정양은 형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생사도 알길이 없고 지금의 궁정교회 교인들 중에는
정양은 형과 그 부모형제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공산군이 싫어 평양에서 일찍 피난을 나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던 그분들은 종무소식이 되었습니다.
..............................................................................

세번째는 군사정부 하에서 계엄령 하에
모든 집회가 금지되면서 교회의 예배도 금지한다고 발표했었습니다.

기독교는 크게 반발을 하였습니다.
기독교 대표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계엄사의 포고령을 무시한 채
예배를 강행하였습니다.

궁정교회에는 당시 내무부 차관이던 김득황 장로가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 저녁 궁정교회에서 MYF 순회예배를 드리던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채택하여 낭독하고
설교하시던 최요한 목사님은 흥분하여 울분을 토로하시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정규의 예배는 허락한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나
그 밖에 정치적인 성격의 예배는 불법집회로 간주되어
당국의 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간구하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예배를 금지시켰던 사람들은 다 망해서 물러나고
우리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아무때 어느 곳에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지금도
종교적, 정치적, 사상적인 이유로 예배를 금하고 있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인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가름할 수 없을 때
교회에 나아가 힘껏 큰 소리로 찬송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1.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2.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3.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4.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후렴)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아멘


그곳에서 나늘 향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늘 우리의 찬송을 기뻐 받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44. 전도사의 아버지

목회를 중단하고 수도를 하고 있는 L전도사 이야기
...............................................................................
그는 내가 권사가 되면서 고등부 부장이 되었을 때
전도사 격인 교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파트너 입니다.

그는 본 교회 출신입니다.
그러나 순복음교회 장로님이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순복음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사역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사역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소아마비로 어려서 부터 지체장애자였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도 미성이면서 우렁차고
머리도 좋아 아는 것이 많고
고등부 학생들을 상대로 설교를 할때면
모두 깊은 곳으로 함께 빠져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역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왕이면 감리교에서 목회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여
협성신학교에서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래도 사역지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공부를 더한 그는 글을 너무나 잘 써서
미국에 있는 유명한 한인 신문에 몇년동안 고정 칼럼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이민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아직 열악한 환경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교회 청소에서 부터 교육전도사로서의 일까지
교회 모든 잔무를 도맡아하던 그 교회의 일은
지체장애자인 그에게는 너무 힘에 겨웠습니다.

그는 결국
전도사를 포기하고 그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이 숙식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서
6개월을 머물다가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머물던 곳은 절에서 운영하던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장로님이셨던 아버님의 믿음을 이어받아
주님께 헌신하였던 그는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려하였으나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몸 담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귀국한 그는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난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기차나 뻐스를 타고 먼 길을 갈때면
습관적으로
주위에 있는 청년들을 붙들고 전도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을 버렸나요?

아닙니다.
나의 믿음은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교회에 다니지 않나요?

그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웃기만 합니다.

저는 두고두고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어느 교회에 가면
그가 용기를 내어 다시 그의 삶을 바쳐 봉사할 수 있게 될까?

방공호를 개조하여 만든 셋집의 작은 방에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들의 목회하는 모습을 기다렸던
그의 아버님의 경건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전도사의 아버지

대학을 졸업한 모든 자식들이 취직하여 돈을 벌면서
가난한 삶이 피어나고 자식의 성취한 것을 자랑하는
친구들 앞에서 묵묵히 웃기만 하던
전도사의 아버지

그 장로님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이 땅에 있는 많은 전도사님들과
그리고 아들이 나실인이 되기를 기다리는
많은 전도사의 아버지들
.......................................................................

지체장애자인 그는 50이 넘었습니다.
공학박사가 된 동생과 함께
지방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는 목회를 중단한 그 전도사가
수도사의 삶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43. 교회를 개척한 두 장로님

중부연회 십정교회 성형모 장로님과
서울연회 삼청교회 임광남 장로님의 이야기
.............................................................................
1) 성형모 장로님은
교회를 6곳이나 개척하고
은퇴를 앞 두고 마지막으로 7번째의 교회개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6곳 모두가 중부연회에 있으며
지금도 활발히 발전하고 있는 교회들입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개척하여 30~40명의 장년들이 모이면
자신은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가
다시 다른 목사님을 모시고 개척을 하기를 6곳을 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평생
자기의 재물과 자신의 능력으로 개척한 교회는
한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재물로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청년 때 첫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작은 땅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 장로님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주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남아있는 모든 재산으로 주님의 동산을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교회개척의 비결은
처음 유년부교회로 시작하여
1~3년 동안 어린이 교회를 이루도록 힘쓰다 보면
장년부가 생기고 교회의 바탕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은
교회를 치리할 목사님과 절대로 흩어지지 않는
종자 교인 7~8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교회학교에서 봉사할 교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S장로님은 식당에서 기도할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면서도
그 장로님에게는 항상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경건함과 겸손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

2)임광남 장로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의 간부가 되었을 때
졸라대는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그분은
첫해부터 부모님 제사를 추도예배로 바꾸고
형제들의 비난을 무릎쓰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유명한 대학의 학력을 가진 아내인 집사님이
협성신학교를 마치게 되었을 때
두 분은 교회에 인사하고 3년의 말미를 받아
과천에 가정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아파트를 한 채 사서
입구에 플라스틱으로된 작은 교회간판을 달고
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례금을 드릴 수 없던 개척교회는
사례금 대신
신학대학의 교수로 계시던 목사님을 그 아파트에 사시게하고
평일에는 주택으로 사용하고 주일과 수요일에는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방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설교하시는 목사님을 중심으로 부부가 둥글게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와 기도를 할 때는
모두 손을 붙들고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각 가정이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하여 사랑의 교제를 하였습니다.

개척한지 2년이 된 가정교회가 점점 부흥하여
장년부와 유년부가 100명을 넘게 되었을 때
목사님의 사례금도 책정하게 되고
예배장소가 비좁아 더 큰 장소로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부부는 장소를 이전하는 것을 보고
개척교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본 교회로 다시 복귀하였습니다.

본교회로 복귀한 이유는
개척의 핵심이었던 부부가 그곳에 있으면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사이던 아내와 남편은
본 교회에 복귀하여 다시 집사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
그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지금은 안정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후
전도사이던 집사님의 아내는
다른 교회로 옮겨 전도사로 봉사중이고
집사님은 장로가 되어 시무하다가 금년에 은퇴하여
원로장로가 되었습니다.
..................................................................................

3)성형모 장로님과 임광남 장로님의 공통점은
경건한 삶과 겸손한 모습입니다.

언제나 목사님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모든 교인들을 사랑하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두 장로님들을 볼 때마다
저분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나실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42. 목사님의 남편

고 최기덕 권사님은 삼청교회 출신입니다.
그는 교회학교와 청년부와 성가대에서
늘 중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학교 총무로 있으면서 거의 매일 교회에 나와
그 다음 주에 있을 주일학교 교안 준비를 하였으며
성경읽기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군은 어느 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일군이 결혼을 하여 바빠지게 되면
누군가 그 후배가 나타나서 그런 일을 계속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비록 전도사는 아니더라도 그런 일군도 분명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
그때
감신에서 두 사람이 실습전도사로 오게되었습니다.

두 여자 실습전도사님은 교회학교에서 봉사하게 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과 최기덕은 연애를 하게되었습니다.
아주 성실한 사람이라 우리 모두는
두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게 되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실습전도사는 최기덕에게
직업을 갖게되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기전에는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2~3년씩 취업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말에 자극을 받은 최기덕은
그날 부터 약 1년 반동안 모든 것을 중단하고
취직시험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하고
보건사회부의 공무원이 되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각하기를
최기덕은 하나님께 마치 나실인처럼 열심히 봉사하여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
최기덕 권사님은 보건 사회부와 환경청에서 과장으로 일하면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여러개의 법안을 기안하여 만들었고
그의 아내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인 아내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교목으로 있다가
지금은 서울시내 어느 교회의 부목으로 있으면서
청소년문제상담실 책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기덕 권사님이 소천하기 몇년 전
종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처럼 다방에 앉아 오랜시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평생 소원이
작은 교회건물을 하나 건축하여
아내로 하여금
그곳에서 단독목회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마음만 먹으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교회를 건축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정색을 하면서

저는 크리스쳔인 동시에 목사의 남편입니다.
크리스쳔의 양심으로도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만
더욱이 목사인 아내를 보아서도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저는 평생
뇌물을 받은 적이 없고
또 받을 수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개 목사의 남편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더 큰 욕을 먹게되고
아내의 목회를 망가트리는 사람이 됩니다.

불법으로 돈을 뫃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내가 봉헌한 교회에서 아내가 목회하는 것을 꼭 보려고 합니다.
....................................................................... ..............
그런지 몇년 후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최기덕 권사님은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를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고 있습니다.
최기덕 권사님과 아내인 목사님은
이미 아주 훌륭한 교회를 하나님께 봉헌하고 있다고 믿고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베드로의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두 분의 귀한 믿음은
이미 하나님께 귀한 교회를 만들어 섬기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는 보이는 건물과 화려한 장식이 있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과
주님의 사랑과
주님과 교통하는 기도가 있는
영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41. 이분조 할머니

30년을 철야기도하다가 소천하신 이분조 할머니의 이야기
........................................................................

신촌교회(장로교)에는 96세에 소천하신
이분조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신촌 대흥동에 살던 이분조 할머니는
늙도록 예수를 믿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청상과부로
남편이 남긴 작은 집에서 구멍가게를 하면서
외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많은 서울 사람들이 그렇듯이
오래동안 집안에 7개의 신주를 모시고
재래 무속신앙을 갖고 살던 분입니다.

그런데
환갑이 넘으면서 며느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며느리는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를 믿다가 그 가정에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며느리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꿈에 빨가벗은 애기동자가 나타나

나는 이 집의 터주대감인데
당신 며느리 때문에 앞으로 굶어죽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없이 이 집을 떠난다.

고 하면서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날 날이 새자
이분조 할머니는 집안에 있는 신주단지 7개를 집어내어 불사른 후
신촌로타리 근처에 있는 신촌교회에 등록하고
아들 내외와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구로동과 일산 등으로 여러차례 이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96세로 돌아가실 때 까지 30여년 간 몸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이분조 할머니는 한 주도 빼놓지 않고 본교회의 예배를 참석하셨습니다.

그 할머니가 앉으시는 자리가 고정되어서
목사님도 설교를 하실 때에는 그 자리를 먼저 보면서
설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교인들이 보기에는
이분조 할머니의 얼굴이 항상 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 할머니의 철야기도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철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녁 6시면 담요 한장을 들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다가 잠들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 6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철야기도를 시작하신 이후
단 하루도 집에서 주무시는 날이 없었습니다.

집이 신촌에서 먼곳으로 이사를 가게되자
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에 가서
그 교회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철야기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귀한 친척이나 친지가 찾아오더라도
저녁 6시가 되면
그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회로 가서 철야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증언)

환갑이 넘어 늦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분조 할머니는
9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몸이 쇠약하여져서 집에서 문밖출입을 못하던 2년을 빼고는
매일 교회에 나아가서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자손들은 물론 다 잘되고 건강하게들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분조 할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이분조 할머니의 30여년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신앙의 지표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인 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러나 몇년 전 소천하신
아무 직분이 없으셨던 이분조 할머니를 생각할 때 마다
신앙인의 양심으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나는 과연 무슨 염치로 주님의 낯을 뵈올 수 있을까

교회를 깊이 사랑하지 못한 죄
일편단심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지 못한 죄
깊고 깊은 기다리는 기도를 하지 못한 죄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온전하고 깊은 회개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40. 김정복 목사님

기독교대한감리회는 몇번의 개혁운동이 있었습니다.
6.25. 이후 1950년대의 호헌운동과 1970년대의 성화운동
그 후에도 몇번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두번은 총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교단분리까지 시도하였으나
모두 도중에 화해하고 도로 통합하고 말았습니다.
그 전부터 지금까지 개혁을 웨치는 소리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김정복 목사님이 권사가 되었을 때
담임목사님이 분리된 교단의 초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교단이 분리되고도 싸움이 그치지 않아
목사님은 교단일로 늘 바쁘게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인들은 그 소용돌이를 싫어하고
하나 둘씩 빠져나가 많은 교인들 중
50~60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자기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였으나
교회가 황폐해 지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목회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교회학교장, 재정부장, 성가대장, 청년부장 등을
겸임하고 있던 김정복 권사는
모든 것이 기도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믿고서
교인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일주일
성가대원들과 일주일
청년들과 일주일
가까운 임마누엘기도원에 가서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한달이 지났을 때
교회는 평안을 되찾았고
모든 교인들은 담임 목사님과 함께 힘을 내어
은혜스러운 교회로 새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정복 권사는 CCC 간사로 있으면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안정을 되찾고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을 때
은행대리로 있던 김정복 권사는 미국선교사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자주 만나지 못하고
년말이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는 정도로 있었는데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십여년 전 TRES DIAS 관계로 미국 LA를 방문했을 때
전화번호라도 알고 있으면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터인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다가
그곳에 마침 은행직원들과 아침성경공부를 하러 왔던
김정복 목사님과 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김정복 목사님은 지금 기도학교 교장이 되어
세계 여러 곳에 다니며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십자군선교단을 조직하여
청년들과 함께 일주일, 보름 혹은 한 달 일정으로
아프리카 오지를 다니며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

김정복 목사님은 지금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며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집은 궁정동 1번지
지금 청와대 본관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구 한말 김홍집 총리의 직계 종손입니다.

그는 지금 기도를 가르치는 선교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고대광실 큰 집에서 명문가의 후손으로
상류사회에서 활동하는 모습보다
아주 훨씬 더 훌륭하고 성공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

일년에 한 두 번씩 귀국하여
기도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오면
교단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의 답은 뻔합니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사람아
뭘 그리 걱정하나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기도하세
하나님이 다 섭리해 주실 것일세
다 우리가 기도가 부족해서 생기는 일들일세

그래도 이번에 나오면
한 번 꼭 물어보려고 합니다.
..........................................................................
현재 LA에서 기도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선교사 김정복 목사님은
청운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청운초등학교 동창들 9명이 55년째 만나고 있는데
김정복 목사님은 해외에 있는 고정 멤버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교단이 갈라져서 싸울 때
개혁을 외치면서 분리되 나간 교단에 소속되어
교우들과 함께 고생하며 눈물을 흘리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의를 위한 투쟁은 있어야 겠지만
그 와중에 교인들이 다 떠나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교인들이 다 떠난 텅 빈 예배당에는
더불어 의를 위하여 토론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39. 박웅천 목사님

98 년의 삼청교회 역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분이 박웅천 원로 목사님이십니다.

전반기 48년 동안 26분의 목사님이 계셨고
후반기 50년 동안 3분의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중 30년이 박웅천 목사님이 목회하신 기간입니다.

국방부 군종실장을 역임하시고
주월사령부 군종실장으로 계시다가
제대하면서 바로 삼청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제대할 때 주월사령관이
오래동안 군에서 고생을 하셨으니
세계일주를 한 번 하시고 들어가시라고 하는 것을
목사가 교회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세계일주는 나중에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사양하고
바로 귀국하여 그 다음 주에 취임하셨습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집없는 은퇴 목사님의 숙소인 주안 감리교 원로원의 총무를 지내신
박창국 목사님의 장남이십니다.

아버님이 만주와 평양 등지에서 목회하실 때 유소년기를 보내신 박웅천 목사님은
철저한 독립지사의 아들로 교육되었으며
실수로 집에서 모르는 결에 일본어를 사용했다가는
아버지에게 반 죽도록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삼청교회에 계신 동안 일본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에도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철저하게 일본어를 한마디도 안하고
돌아오신 분입니다.

일본 공항 직원들이 나이로 보아 일본어를 알 것 같아서
니홍고오 와까리 마스까? 하면 일부러 영어로
I can not! 하면서 지나갔다고 합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신 재학중 서울 수표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전도사로 목회실습을 하셨고
군목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셨습니다.

전투가 끝나면 군종병들과 함께
포탄에 맞아 흩으러진 시신을 거두어 수습했다고 합니다.

김씨 성의 머리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몸통에다
임자를 알수 없는 팔과 다리를 짝을 맞추어
입관을 하였다고 합니다.

전쟁 동안
수많은 주검들을 보았고
직접 처리하셨다고 합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그 끔찍함을 기억하시기 싫어서인지
30년동안 함께 하면서도 전쟁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궁금해서 혹 물으면
마지 못해서
추억을 하듯 먼 산을 바라보는 눈동자로
옛 일들을 회상하곤 하셨습니다.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때는 연대장이

"목사님!
정말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하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할터이니
목사님은 전투에 이기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초저녁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면서 계속되다가
새벽녘에 들리는

"만세~~ 만세~~"

소리를 듣고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유명한 김형욱 정보부장은 당시 같은 연대의 작전과장이었다고 합니다.

주월사령부 군종참모로 있을 때 권총을 차고 다니는 군목들에게
총을 끌르라고 지시하면서 목사는 군복을 입었어도 성직자 이므로
아무리 위험에 처하여도 총을 쏘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웅천 목사님의 설교와 목회는
사랑과 평화입니다.

목사님의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평안을 누리며 살라는 요지의 말씀이었고
신앙생활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모든 교인들이 가정에서
사랑을 나누며 화목하게 사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살피러
많은 심방을 하셨습니다.
봄 가을 대심방 외에도 일년에 한 3~4회 정도
목사님의 수시 심방이 있었습니다.

급히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마취에서 깨어날 때에는 항상 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법과 대학을 나오고 감신대를 나온 박웅천 목사님은
항상 원칙이 뚜렸하였습니다.

지방회나 년회를 할 때에는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는 위원회의 책임을 맡곤하였습니다.
한참 왈가왈부 하다가도
박웅천 목사님이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고 나면
더 이상 논란들이 멈추곤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박웅천 목사님은 분당이 있고 편싸움이 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셨습니다.
감리교단이 두번째 다시 갈라져 싸울 때
삼청교회는 무소속으로 어느 편에도 가담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방회에도 년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교단이 통합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감리교 본부에서 일하시던 어떤 목사님은
박목사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리교회에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분의 이력서는 석 줄 밖에 없어요.
1.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2. 육군군목 제대
3. 삼청감리교회 목사"

"박웅천 목사님은 모든 목회의 표본이십니다"

서울 문래동교회
이기덕 원로목사님은 이렇게 말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감리교회의 거물입니다.
교단의 직책을 맡은 일이 없고
부흥회를 다닌 일도 없고
책을 써 낸 적도 없지만
모든 후배 목사들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은퇴를 하신 후
수유리에 있는 박웅천 목사님을 찾아 뵈었을 때
근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즘은 평신도 훈련을 하고 있어.
이제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이 되었지....

담임목사가 이취임을 할 때면
원로목사라고 인사를 오는데
당신은 내 담임목사이고 나는 그 교회 교인이니
식사는 내가 대접해야한다고 하며
식사값을 내가 내곤 했지."

"요즘 평안하세요?"

"처음에는 좀 이상하더라구...
오는 전화도 없고 전화 할데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온 갖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니까 살것 같아...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전혀 새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야."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안할래~
아 나도 이제는 마누라하고 여생을 보내야지
또 그런 스트레스르를 다시 왜 받아.
그냥 쉬게 내버려 두라구...."

부목사는 고사하고 전도사나 사무원 한 사람도 없이 30년을 혼자 견디신
박웅천 목사님의 헌신적인 목회는
삼청교회를 오늘의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봉헌되도록 하였습니다.
..................................................................................................

박웅천 목사님의 열정에 모든 교우들이 일심으로 순종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은퇴하시기 직전
지하 3층과 지상 3층으로 된
현재의 새 교회건물을 봉헌하셨습니다.

교회 밖에는 대단한 카리스마로 독재를 하는 목사님으로 알려졌으나
어떤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혼자 결심을 하지 않고
장로님들에게 결정을 하게하고
자신은 그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면서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서로 미루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였습니다.

일반 목회와 행정은 모두 일임해 줄것을 원하셨고
교단이 분리되었을 때에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교회의 건축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하는
교회의 기본적인 중요사항들은
장로님들이 결정을 해달라고 하셨었습니다.

박웅천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우이감리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며
지금까지 꼭 한 번 삼청교회를 방문하셔서 설교를 하셨을 뿐입니다.

평생을 목회에 전념하신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과 두 따님과 아드님

주님의 은혜로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게
여생을 살아가시기를 온 삼청교회 교우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38. 정두영 목사님

정두영 목사님과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노래를 잘하였습니다.

후에 현대의 CEO를 지낸 박세용과 함께
KBS 방송국에서 어린이 시간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뺀드부에서 플륫을 불었습니다.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그가
왜 노래를 하지 않고 기악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그는 서울대 음대에 진학하였고
미국 맨해튼 음대와 피바디, 이스트먼 음악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캘리포니아대(大) 음악과 종신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

그는 30이 되기 전에 일시 귀국하여
KBS 교향악단 부지휘자로 부임하였었으나
너무 젊은 나이라고 단원들의 반발이 있어
도로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번 실패를 경험한 그는
미국에서 좌절감으로 고통을 받으며
지병까지 악화되자 자살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살도 실패하고
술과 담배와 노름으로 수렁에 빠진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친구의 권유로 부흥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들은 말씀이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죽지도 못하고
자살에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단 15분 만에 단숨에 작곡한 노래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입니다.

이것이
동창인 친구들에게 고백한 그의 회심 내용입니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는
정두영 목사님의 신앙고백입니다.

화려한 학력으로 귀국했을 때는 실패를 하였으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로
모든 명예와 명성을 되찾고 금의 환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라나에로스포라는 혼성 뚜엣의 첫번 멤버인
최안순 사모(산까치야 산까치야)가 부르면서
모든 이들에게 더 사랑을 받는 곡으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정두영 목사님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다가 귀국하여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교향악단을 지휘하다가
2005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사랑하는 우리 모든 감리교회 교우들과 함께
친구의 신앙고백이었던 이 노래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노래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정두영 목사님도 하나님 곁에서
우리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37. 은퇴를 준비하는 목사님

얼마 전
만리현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목사청빙에 대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아니
이 분이 무슨 큰 병이 나셨나

무슨 큰 속상한 일이 있어서
몸쓸 병이 생겨 조기 은퇴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는
교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 사무원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 아무 일 없으세요
아주 건강하세요 지금 심방 중이신데요

나는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벌써 은퇴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안목사님이 은퇴할 나이가 되신 것입니다.
세월이 다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

안경철 목사님을 만난 것은
1959~1960년 군에 있을 때 였습니다.

안경철 목사님은 군수처에 계셨고
나는 부관부에 있었으며
무반동총중대에 고달삼 목사님,
수색중대에 서기산 목사님과 문세광 목사님이 계셨으며
모두 사단군인교회에서 만나 함께 성가대를 했었습니다.

그중 안경철 목사님과 고달삼 목사님은
몸이 조금 뚱뚱한 편이었는데
안경철 목사님은 레스링 선수 출신이라
비만한 듯 보이는 아주 건강한 체질이었습니다.

얼굴에는 늘 넉넉한 웃음이 있었고
소리내어 웃을 때는 마치 테너로 발성을 하듯
호탕한 웃음을 웃곤 하셨습니다.

노래를 너무 잘 하셔서
삼청교회에 초청하여 특별찬송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한 동안 소식이 끊기고 있다가
조금 늦게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산교회 부목사를 거쳐 만리현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동안
그 교회 교우들로 부터 간간히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너무나 가까운 분이었으나
목사님이 되신 분에게
너무 가까이 갈 수 없어서
목회하시는 동안 먼 발치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시는 것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갔군요
...................................................................

저녁에 주택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안경철 목사님
원방현 입니다.

아...오래 간만이에요
그동안 장로가 되셨나

몇년 전 늦게 턱걸이 하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진작 되셨어야지

젊어서 듣던 그 맑고 호탕한 음성...

나는 어디 큰 병이 나신 줄 알았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월이 갔군요

맞아요
세월이 가버렸어요
.......................................................................
마르틴 루터의 리마예식서 직제부분에
교회의 직분은 사명만 있고 권세는 없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경철 목사님에게는 평생 권세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사명과 함께 은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며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교회만을 지키시던 일들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이 안경철 목사님처럼
받은 사명을 위한 은사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
은퇴를 하시면
젊어서 처럼 마음놓고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부르던 노래가 생각합니다.


I've been walking on the railroad
all the live long day
I've been walking on the railroad
to pass the time away

다시 옛날 노래를 청하여
한번 불러 보려고 합니다.
내년 쯔음에는......

36. 먼곳을 바라보자

김정준 작사/박재훈 작곡

먼 곳을 바라보자 저 멀리만 바라보자
앞길을 가로막은 태산준령 보지말고
험한 길 넘고 가면 푸른 하늘 펼쳐있고
산마루 올라서면 넓은 들 가로 놓였네

먼 곳을 바라보자 저 멀리만 바라보자
이 배를 뒤엎고말 노도광풍 일어나도
이 바다 저 끝에는 안식포구 기다리고
이 물결 저 가에는 만세반석 굳게 섰네

먼 곳을 바라보자 저 멀리만 바라보자
폭풍우 크게 일어 내 앞길이 아득해도
임마누엘 하나님 내 갈 길 인도하시니
오늘도 또 내일도 찬송하며 걸어가자

여러 해 전
삼선교회에서 서형선 목사님의 은퇴예배가 있었습니다.

예배 말미에
서형선 목사님과 친구되시는 목사님의 이중창이 있었는데
제목이 바로 먼 곳을 바라보자 이었습니다.

고음의 서형선 목사님은 멜로디를 하셨고
저음의 친구목사님이 화음을 만드셨습니다.
두분은 신학교 때 만나서 50년동안
그 노래를 함께 부르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음이 잘 맞고
은혜스러웠는지....
.......................................................................
우리는 이 땅에서의 은혜스러운 삶과
이후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크리스쳔입니다.

정말
먼곳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는
바로 눈 앞에 닥친 일로
고민하고 고통을 받으며 견디기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참고 견디는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크리스쳔의 덕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영원을 사모하며 먼 곳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서형선 원로목사님은
친구분들과 늘푸른교회라는 개척교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부평부광교회 고흥배 목사님이 은퇴하셨을 때
그 소식을 들으시고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얼른 전도하러 가야겠네

먼 곳을 바라보는 서형선 목사님께서는
은퇴하신 원로목사님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유난스리 오늘따라
이 노래가 부르고 싶어집니다.

35. 아내의 기도

오래 전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서울 여의도에서 집회하실 때
무려 100만명의 인파가 일주일 동안 매일 뫃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량통행을 금하고
마포와 영등포 쪽에서 다리를 건너
여의도 집회장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직장에서 바로 집회장소로 향하던 나는
마포에서 다리를 막 건너 들어가다가
집에서 같은 집회장소에 들어가고 있던
아내를 만났습니다.

너무 놀란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말하였습니다.
아니 이 100만명 속에서 이렇게 서로 만나다니...
우리는 천생 연분인가봐...
그리고 한 참을 웃었습니다.

아내는 평생토록 지금까지
나를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다면
첫번 째로 우리 아내의 기도를 말하겠습니다.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의 무엇이 과연 하나님의 형상일까?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들어갈 때
나를 만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가족들의 얼굴이 밝을 때는 내 얼굴이 밝을 때이고
가족들의 얼굴이 어두울 때는 내 얼굴이 어두울 때입니다.
그것을 알고 부터는 집에 들어갈 때
얼굴의 모습을 환하게 만들어서 들어가곤 합니다.
.............................................................................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가 없다면
그것은 나의 믿음의 문제입니다.
....................................................................................

언젠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주님을 만났을 때
나를 도웁는 배필 아내를 내게 주신 것을
제일 먼저 감사하려고 합니다.

34. 사랑과 영원의 대화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서울 시내에는 중고등부 학생을 위한
신앙강좌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몇분의 강사가 중고등부 학생을 위한 강사로 활동하셨는데
그중에도 제일 유명한 강사는 목사님도 대학교수도 아닌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던 집 앞에 있는
안동교회의 중고등부 지도교사이던
김형석 선생님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도
교회 근처에 있는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시던
김형석 선생님을 모시고 신앙강좌를 갖었습니다.

선생님은 너무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듯 말씀하셔서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암프장치를 사용하는 교회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온 예배당이 중고등부 학생들로 꽉 찼습니다.
모두들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을 하고, 흥분을 하고 있었습니다.
...........................................................................
사랑과 영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은 어머니를 이야기하며
사랑을 설명하셨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멀리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시던
어머니를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분의 강좌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극적인 신비주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는 그 지극한 마음의 표현은
그것을 보고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더 아름답고 실감이 나는 곳으로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
영원이란
시간과 구별되는 다른 개념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존재에서
영원으로 옮겨지는 존재로 설명되었습니다.

그 강의를 듯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쯔음
김형석 선생님은 연세대학교의 철학교수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들에게 들려 주시던 사랑과 영원에 관한 이야기는
『사랑과 영원의 대화』라는 제목의 책으로 만들어져
오래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필독서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아마 60~70세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두 김형석 교수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거나 하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
그 후
우리들의 교회는 많은 부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모든 교회에서는
현재의 기독교에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미래지향적 교회로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그곳에는 영원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현재에서 더 낳은 미래를 향한 이야기만 무성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고있는 교회에서는
영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말씀의 주제가
현재의 삶과 미래를 위하여
어떻게 복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로 집중되고 말았습니다.
.............................................................................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는 현재와 미래는 있어도
영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영원을 생각하는 사람도, 사모하는 사람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영원에 관한 성경은 모두
시간 속의 미래의 이야기로 격하되어 버렸습니다.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여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서
현재를 잡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찰나에 벌써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現存(Da Sein)』이라는 잡지가 생각납니다.
어른의 손바닥 보다 조금 더 컸던 그 책은
두께도 불과 20여페이지 밖에 안되었는데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잡지였습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피조물로서의 인간,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
김형석 선생님의 사랑과 영원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그리워집니다.

미래를 향하여 무한히 가고있는 시간 속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가 다시 듣고 싶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영원한 하늘나라는 어떤 곳인지
영원한 삶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인지

33. 어느 원로 목사님

L 목사님은 65세에 조기 은퇴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교회는 약 800명이 모이는 큰 교회였고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일찍 은퇴하셨습니까

목사님은 웃으시면서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치리하는데 나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더 낳은 미래지향적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내가 물러나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목회하시는 동안
어떤 교회가 제일 기억에 남으십니까?

이번에는 사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안양에 있는 XXXX교회입니다.

왜 그렇지요?

목사님이 말씀을 계속 이어가셨습니다.

내가 감리사로 있을 때
그 교회 폐지 신청이 들어왔어요.
내가 감리사로 있으면서 교회를 늘리지는 못할망정
교회를 정리하는 것은 내 믿음이 허락지 않아
그 교회의 폐지를 중지시키고

내가 담임으로 있던 300명이 있던 교회를 사임하고
그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물론 전임 교회 교인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나는 떠나려는 마지막 남은 교인 권사님을 붙들고
떠나지 말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우선 빚으로 건물이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나는 유산으로 받은 집을 처분하여 교회의 빚을 갚고
그 권사님과 함께 교회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전임 교회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하였더니
매달 쌀 한가마씩 도웁는 것은 꼭 허락하셔야 한다고 하는것을
한사코 거절하였습니다.

불과 2년 만에 교인수가 100명을 넘게 되었고
지금은 그 지역에서 리더교회가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내 자신의 집은 없으나
그 일이 가장 보람되고 기억에 남는 목회입니다.
........................................................................
목사님은 은퇴 후
약 1년간 공백이 있던 교회에서 임시로 시무를 하셨습니다.

그곳을 그만두고 교회사택에서 나오시면서
전세집 얻어갈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작년에 그 목사님을 만났을 때
돈을 좀 벌어야 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어떻게 돈을 벌으시려 하세요
은급비가 부족하시나요

목사님은 약 100만원의 은급비와 년금수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월 200만원이 필요하여 부족한 100만원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그동안 매달 도움을 주던 교회들이 있었는데
내가 은퇴를 하였다고 그것을 중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활비는 얼마 들지 않지만
평생 하던 일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이제는 중단하셔도 어느 누구도 섭섭해 할 분이 없습니다.
형편대로 하시고 부족한 것은 중단을 하세요

그러나 목사님은
그 교회의 형편이 중단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새도 새벽기도를 하시나요?

물론이지요
평생 새벽기도를 하라고 교인들을 가르치고서
은퇴하였다고 중단할 수가 있나요

목사님은 지금
방문 판매 회사에도 가보시고
다단계회사도 적을 두어보시곤 하시지만
만나면 한숨을 쉬면서 말씀하십니다.

물건을 팔아야 할터인데
팔러 갈 곳이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교인들 밖에 없으니
이것을 어디에다가 팔지...

목사님
이제는 그만 두세요
있을 때는 도와주어야 하지만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아니에요
그래도 그 하던 일을 그만 둘수가 없어요
..............................................................................
사역지를 잃고 생계가 어려워진 어떤 목사님은
주요소의 주유원으로 일하시면서 다음 사역지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L 목사님은 은퇴를 하시고도
지금 현역에서 목회하시는 후배들을 도웁기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다
주님과 동행하고 계신
우리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성인 목사님들입니다.

32. 박창국 목사님

주안 원로원 총무로 오래 계시던 박창국 목사님은
삼청교회 박웅천 원로목사님의 부친이십니다.

박웅천 목사님이 삼청교회에 시무하시던 기간에
여러번 아드님 댁에 오신 것을 뵌 적이 있었고
몇번 설교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키가 크시고 체격이 당당하신 목사님은
얼핏 보아도 아주 건장한 모습의 체격이셨습니다.
설교하실 때에도 늘 열정적으로 하셔서
시간 가는 것을 잊을 정도이었습니다.

국내와 만주등지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항일 독립투사들을 많이 접촉하셔서인지
왜정 때 모두 일본말을 의무적으로 하게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개명하던 시절
자녀분들이 실수로 아버지 앞에서 일본말을 사용했다가는
반 죽도록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여러번 들은 설교중에서 기억이 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88세로 소천하시고
직접 개척하여 건축하신 동신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릴 때
식장 스피커에서 생전의 육성으로 설교가 들려지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유명한
우리도 주님처럼 저주를 받자
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하려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함께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리라면
주님이 지셨던 그 저주의 십자가를
우리도 마땅히 져야합니다.
.....................................................................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박창국 목사님이 마지막 길에 남기신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각오하기는 커녕
모든 죄의 짐과 저주는 주님께 떠맡기고
하늘나라의 복과 영광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해서
과연 우리는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인지...

매일 기도할 때에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면서도

이 사람아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어떻게 하려나

어디에선가
박창국 목사님의 호령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31. 고성 동호교회

여러 해 전
여름 물난리로 온 나라가 떠들석 할 때에
우리교회에서는 수재를 당한 3곳의 교회를 후원하였습니다.

그중
고성에 있는 동호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읍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큰 마을이 있었고
마을 어귀에 아담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당과 예배당에 붙어있는 주택이 있었고
예배당에는 강도상과 의자, 암푸시설 등
교회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부임하신지 5년이 되었는데
부임할 때의 네명의 교인이 더 늘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중에도 제일 젊으신 분이 70대 초반이시고 거의 80 전후의
노인들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600년이나 된 오랜 사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대대로 모태 불교신자들이라
개종은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사모님이 대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참 이상한 방법으로 먹여주고 계시답니다.
마을사람들이 교회는 나오지 않으면서도
목사님도 마을사람이니 굶으시면 안된다고 하면서
쌀을 대주고
자기네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밭 한 이랑씩을 주면서
각종 반찬거리와 김장거리를 마련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전도가 되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다음 세대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로 하고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는 어린이 학원을 개원하였더니
(사모님은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음악선생이셨습니다)
50~60명의 아동들이 뫃여
그들을 중심으로 유년부를 운영하였더니
지금은 고성에서 제일 큰 유년부를 갖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의 복음화를 위하여 50년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아디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그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 마을이 복음화 될 것입닌다.

우리는 목사님과 함께 Vision 2010이라고 하여
10년 계획을 진행중이 었는데
목사님은 아예 50년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1~2년도 아니고 50년을 한 목적으로 기도한다는 것...

내 평생에 하다가 후임자에게 위임하고
그 목사님이 다시 후임 목사님에게 위임하고...

말씀하시는 목사님과 사모님의 눈에서는
확신과 희망에 찬 미래가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과 바닷가에는
지금도 이런 많은 성인이 된 감리교 목사님들이
자리를 지키며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우리 감리교회가 은혜스러운 이유는
이런 많은 목사님들의 희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30. 백암교회

학교 공부를 하다가 말고
애국자인 양 군에 자원입대하였는데
그 이듬 해에 3.15부정선거가 있었고
4.19때에는 서울에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단장이 출동을 보류하는 바람에
서울 거리에서 학교 친구들과 맞닥드리는 불쌍사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말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사모님이 찾으셔서 교회에 가보니
목사님이 온양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셨는데
내려와서 찬양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사모님이 주신 주소를 갖고
기차를 타고 온양역에 내렸습니다.
그곳에는 온양 백암교회 담임 전도사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해 정월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온 천지가 하얀 색으로 덮여있었습니다.
전도사님과 눈길을 걸으면서 이얘기 저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30~40분 걸어 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교회는 작은 시골교회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강사로 오신 이재은 목사님이 반겨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설교하기 전
찬양을 하나씩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는 월요일 저녁에 개회 예배로 부흥회를 시작하면
토요일 아침 폐회예배로 끝을 맺곤 하였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도착한 저는
새벽기도를 뺀 나머지 시간 8번의 찬양을 하였습니다.

제가 불렀던 찬양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장미꽃 위에 이슬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등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마루바닥으로 된 예배당에는
모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었는데
예배당 강도상 근처 오른 쪽에 의자 두개가 있고
앞줄에는 여자 네 사람, 뒷줄에는 남자 네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해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된 분이 지휘를 맡으셨는데
화음이 제대로 맞지 않고 박자도 엇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얼굴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경건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찬양을 보고 들으면서
천사들의 찬양을 듣는 듯 도취하고 말았습니다.

아!
얼마나 아름답고 신령한 노래인가

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드리었는데
그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을 두고
그 때의 그 아름다운 성가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때의 그 신령한 노래를 부르던
거룩한 찬양대를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요사이는 교회마다 아름다운 성가대가 있고
웅장한 관현악단이 함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멋있는 찬양을 들으면서도
자꾸만 옛날 온양에서 듣던
그 8명의 미니 성가대가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나 스스로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찬양을 더 기뻐받으셨을까
늘 그것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
금요일 저녁 예배가 끝나고 잠을 자려는데
모두 추워서 잠을 못이루고 있었습니다.

방은 두 칸인데
아래 칸은 아기가 있는 사모님이 주무시고
윗칸에는 강사 목사님과 그 옆에는 강사를 따라온 제가 자고
맨 윗묵에는 담임 전도사님의 주무셨습니다.

자기 전에 군불을 때기는 하였지만
아래칸만 밍큰 할 뿐 윗칸은 냉기만 가신 정도였습니다.
목사님은
어 추워 뭐 좀 없나
하시면서 두리번 거리시더니
그 날 성만찬을 하고 남긴 포도주가 들은 주전자를 집으시고
흔들어 보시더니 남은 푸도주를 몇모금 잡수셨습니다.
(그 때는 상점에서 파는 진짜 포도주를 사용했습니다.)

조금 후
으~ 추워 .. 조금 났군~
하시면서 잠이 들으셨습니다.

요즈음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대목입니다.
교인들이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1주일 분이라고 하면서
부엌 옆에 놓고 가면
전도사님과 사모님은 그것을 7등분하여 밥을 짓고
군불을 때고 살아야 했습니다.

주위에 나무는 많이 있었지만
남의 산에 가서 함부로 가랑잎을 긁어 올수도 없고
남의 산에서 썩어 떨어진 삭쟁이도 함부로 줏어 올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이 그것들을 줏어다 땠어도
동네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전도사님은 그것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
저는 온양의 백암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미니 성가대와 함께
추위에 벌벌 떨며 추위를 견디고 목회를 하시던
전도사님이 생각납니다.

목사님이 되신 전도사님은 얼마 후
다른 교회로 옮기시어 목회를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목사님의 성함을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쯔음 은퇴하시고 70대 중반이 지나셨을 터인데
근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교회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 해 겨울
눈길을 걸으며 찾아간
온양 백암교회를 떠올려 보곤 합니다.

29. 조암교회

6.25를 겪고 9.28 수도탈환으로 마음을 놓고 있던 서울사람들은
그 이듬해 1월 4일을 기하여 전체가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무역업을 하시던 작은 아버님이 트럭을 한 대 사시는 바람에
20여명의 두 집의 가족들은 트럭에 짐을 싣고 가기로하고
영등포에 있는 대방동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트럭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근 20여일을 대방동에서 트럭이 수리되기를 기다리다가
너무 상황이 급박해지는 바람에
트럭은 물론이고 모든 짐을 버려둔 채
모두가 걸어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
우리가 피란 간 곳은 화성군 우정면 호곡리라는 곳으로
일명 버마지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는데
바다를 끼고 있는 어촌형의 마을인데
마을의 주업은 어업이 아니고 농업이었으며
아주 평안하고 아늑한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그 때 우정면 전체에 교회가 있는 곳은
조암시장 근처 언덕에 있는 조암교회 뿐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을 모시고 십오리 길을 걸어서
교회에 가보니 일반 주택에 조암교회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있었고
안방, 마루, 건너방 식의 일자 집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약 십여명의 교인들이 뫃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인도는 나이가 지긋하시고 풍채가 좋으신
남자 속장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예배는 아주 경건하고 정중한 마음으로 드리었습니다.
설교를 하시는 속장님의 말씀이
유창한 언어구사를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린다는 감사와 정성만 있을 뿐
속장님의 설교스타일에는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몇달 지났을 때
서울 청량리에서 목장을 하시다가 피란오신 장로교 장로님이
대신 설교를 하시었습니다.

선뜻 강단을 내어주신 남자 속장님의 믿음이
돋보인 것은 그때부터 였습니다.
장로님의 설교는 속장님의 설교보다
훨씬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사회와 교회의 행정은
속장님이 계속 주관하셨습니다.

피란 생활이 한 2년 쯔음 되었을 때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 날이 있었습니다.
제암리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이 오시는 날인데
예배장소가 작다고 그 날에는
조암 시장에 있는 마당이 넓은 한옥을 빌려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예배에는 약 50명 이상이 참석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마루와 마당에 사람들이 꽉 차있었고
모두 예수님을 만나듯 목사님의 얼굴을 보려고
기다렸습니다.

요즈음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훌륭한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면
예수를 믿지 않던 면장이나 인근 마을 유지들이 예배에 참석하여
함께 설교를 듣곤 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깡마른 몸의 늙으신 목사님은
눈물로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시고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설교를 하시면서,
그리고 우리는 들으면서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의 내용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중 피란 길에서 모두 고생을 하고 있지만
부활의 주님의 약속을 믿고 힘을 내자는 말씀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던 교인들은
그 훈훈한 은혜스러운 마음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고
간직되고 있었습니다.
5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은혜스러운 마음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요즈음
은혜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면
일주일을 준비하고 기다리신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새벽마다 동네 집근처에 가면 목사님의 얼굴을 보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인터넷과 텔리비젼을 켜면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지금 현재 우리들의 삶의 모습들이
그 때 그 피란시절 웅기중기 뫃여서 예배를 드리던 때 보다
더 좋아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많은 은혜를 베풀고 계신데
우리들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예전보다 오히려 더 후퇴한 것 같으니 참 이상한 마음이 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드리려는
우리의 마음이 타락해서 그럴까요

28. 흥하는 교회

제가 속해있던 상인 신우회가
1979년 1월1일서 부터 일주일 동안
동두천 밀알기도원에서 있었던
약수동 신일교회 지도자들 신년기도회 가는 길에 동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 9시경 신일교회 회의실에 가보니
장로님들과 남녀전도회장이 와있었고
조금 있으려니까 이광선 목사님이
기도원으로 출발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러 오셨습니다.

얼핏 보기에 한50세 쯔음 되어보였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고 나가신 후
그 교회에 다디던 우리 신우회 한 분이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연세가 얼마나 되보여?』

『한 50 되시지 않으셨을까...』

그는 웃으면서

『우리 목사님은 금년 34세야』

그 말에 모두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런 큰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34세라니...
그보다 장로님 이하 모든 교인이 공손한 마음으로 대하며
섬기는 자세에 더 놀라고 있었습니다.

『전임 목사님 계실 때 부목이셨는데
사임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면서 담임목사가 되었어요.
최고야....』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웠습니다.

『예수님도 33세 이셨잖아?』

그리고 우리를 보고 동의를 구하듯 물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뵙고 보니
어때?』

『참 은혜 스럽게 보이시네
인자해 보이시고..』

그는 길을 가는 동안
계속 목사님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1년 후 그분이
국방장관을 지내신 김성은 장로와 함께 장로 취임할 때
그의 초청으로 참석했었는데
연신 우리 목사님 최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모든 교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신일교회 교인들을 만나면
누구나 목사님과 교회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근처 부동산을 구입하기 시작하더니
정말 큰 건물을 새로 짓고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는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오후 예배를 드리고 가다가
그곳 저녁예배에 참석해 보면
여전히 옛날과 같은 은혜스러운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은혜스러운 분위기...
그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인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겠습니까

기도하는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들의 교회는
과연 은혜스러운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깊이깊이 반성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들 교회의 목사님과 우리들의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자랑하고 있는지를....

저는 흥하는 교회를
생각할 때 마다
신일교회를 떠올려 보곤합니다.

27. 조지송 목사님

1960년~1970년에 이르는 동안
영등포를 위시한 전국의 공업단지에서는
보세가공이 유행하였습니다.

보세가공이란
전량 수출을 목적으로 원자재를 수입하여
그것이 수출될 때까지 관세납부를 유보해주는 제도입니다.

일반수출품은 국내에서 기획하고 만들어서
들어간 원가에 일정한 이익을 붙여서 수출할 수가 있지만
보세가공은 결정되어 있는 수출가격에
수입원자재 값을 빼고 나면 국내에서 쓸 수 있는 돈은
제한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일반적으로 수출가격에서 수입원자재 값을 뺀
국내에서 쓸 수 있는 돈이 50%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데
그 당시의 보세가공품은 30%도 채 안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10%로 포장비를 빼고 10%로 투자한 돈의 이자를 빼면
나머지 10%로 인건비를 맞추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나마 작업이 부진하여 예정보다 생산이 늦어지면
이자를 감당 못하여 적자수출을 하기가 십상이었습니다.
영등포에서 제일 큰 회사였던 내가 다니던 회사는
결국 그 이자를 감당치 못하고 불실기업으로 정리당하고 말았습니다.

쌀 한가마에 3,500원~4,000원 하던 시절
공장 여성 종업원 초임이 일당 60원 기준일 때
한달 수입이 잔업수당을 포함하여
2,000원~2,500원이 고작이었습니다.

일당 40원~50원이
흔하던 시절입니다.

정부에서는
왜 그런 보세가공을 장려하고 있었을까

비록 아주 작은 임금일지라도 가공을 위한 사람들의 일자리가 생기고
수출포장 산업이 생기며
항만까지의 국내 운송 일거리가 생기고
수출입을 위한 창고업과 선박 운송업이 추가로 발생하여
많은 일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런 환경 속에서
도시산업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공장에는 약 300명의 종업원이 있었고
나는 150명의 여성 종업원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절반 가량이다가
월급을 타기 일주일 전이 되면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은
⅓도 되지 않았으며 가끔 작업하다가 졸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몸이 아파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가
쌀이 떨어져 며칠 굶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비로 공장 앞 가게에서 빵을 몽땅 사다가
밥을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며칠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여의도 판자집에서 자취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수출일정 때문에 일요일도 출근하여 일할 때가 많았는데
도시산업 선교회 조지송 목사님을 청하여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조지송 목사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공장 저 공장을
담임목사님이 교인들을 심방하시듯 다니며 살피셨고
공장 책임자들과 공장의 형편과
종업원들의 대우등을 물으시고 가시곤 하셨습니다.

혹 낮시간에 외부에서 길을 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조지송 목사님과 만나면
가시던 길을 멈추고 서서 길가에서
공장 종업원들과 그 미래에 대하여 한시간씩 이야기를 하곤 하셨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서울의 여러 남녀 대학생들이
산업의 현장을 체험하기 위하여 한 공장에 두명씩 배치되어
한 달 동안 공장체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도시산업 선교회 간사이시던 오철호 목사님의 인도로
문래동 작은 여관에 묵으면서
아침에는 공장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여서는 그날 공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나눔을 가졌다고 합니다.
.................................................................................
후에
오철호 목사님은 미국으로 가셨다는 말을 들었고
조지송 목사님은 도시산업선교회를 계속 이끄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퇴직하고 직업을 바꾼 후
조지송 목사님을 만나뵌 일은 없습니다.

군사정부시절
도시산업선교회 일로 많은 옥고를 치르신 것을
신문지상을 통하여 알게되었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를 떠 올릴 때 마다
공장 이곳저곳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헌금 수입도 없고(그때 환경이 그렇습니다)
공장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여도 드리는 사례금도 없고
그냥 광야와 같은 공장의 숲속에서
젊음을 불태우시던 조지송 목사님이

지금은 아마도 연세가 80이 넘으셨을 터인데
아직 살아계신지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광야와 같은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도대체
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도시산업선교회 멤버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 마다

연약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자전거를 타고 공장을 심방하시던
조지송 목사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분이 혹
우리와 함께 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기도를 많이 하셔서인지
꾸부정한 허리에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푸른 색이 도는 늘 맑은 눈동자를 갖고 계셨으며
우뚝 솟은 콧날하며
잔잔한 미소......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모습.....

26. 사경회

지금은 모두 심령부흥성회라는 말을 쓰지만
6.25 전후 까지만 하여도 모두 사경회라고 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저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서 사경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지금의 부흥회는 신유의 은사를 중심으로한
방언과 통변, 예언 등의 은사중심의 집회이지만
전에는 주로 성경을 심도있게 공부하는 집회였습니다.

집회는 월요일 저녁에 시작하여서
매일 새벽기도, 아침 10시, 저녁 7시 등 세번 있었고
금요일 밤 철야집회(새벽5시까지 밤을 꼬빡 새우는 집회)를 하고 끝나거나
토요일 새벽기도 혹은 아침집회를 마치고 끝나곤 하였습니다.
그때는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서
그 안에 집회를 끝내거나 통행금지가 끝나는 새벽 4시 이후에
집회를 마쳐야 했습니다.

아침 10시~10시반에 시작한 집회는 오후 1시~2시까지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오후 집회는 없었고 대신 예배당 안에 숙식을 하고 있는
중환자들을 위한 안수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하여도
화신 뒤에 있던 중앙교회나
지금의 자교교회 이외에는 큰 예배당을 가진 교회가 없어서
의례 그 두곳 중 한곳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동대문교회는 동대문지방이었습니다)

일년에 여름과 겨울에는 교회별로 성경학교가 있었고
장년들은 주로 따듯한 봄이나 여름에 사경회로 모였습니다.

저녁 7시경부터 시작되는 집회는
4시 지나면서 모이기 시작하여
멀리서 온 숙식하고 있는 환자들 때문에
6시경이면 예배당 내부 자리는 벌써 없었고
그 이후에 오는 사람들은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그 곳에 앉아야 했으며
마당에는 큰 스피커가 준비되어서
강사의 얼굴은 대면하지 못한채 예배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병이 낳았다고 간증하는 사람은
일년에 한 두명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회를 3일로 줄여서 하고
신유간증도 많이 하는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은혜스럽게 기억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왤까

나만 그런가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자기들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예배당 내부에는 의자가 없고 방석을 깔고 앉았으며
집회시간도 훨씬 길었습니다.
7시부터 시작하면 10시~11시나 되어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가마니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그 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은혜스럽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왤까

아마도
그때의 강사 목사님이나 사경회 분위기가
지금보다
더 경건하고 거룩한 분위기가 아니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는 일은
외형상 나타나 볼 수 있는 은사와 기적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 자신들의 경건한 마음과 삶의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심령을 부흥시키기 위한 집회가
물질의 풍요를 가저오게하고 물질이 교회보다 더 커지는 것보다는
성경을 심도있게 공부하고 우리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고 동행할 수 있는 경건한 예배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흔히
방언을 못하면 영적체험의 기초도 안된 사람이라고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못하여도 더 은혜스러웁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쳔들을 더 많이 볼수가 있습니다.

깊은 영적체험들이 자기 중심적인 독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그 교만함이 오히려 교회의 평화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고 있습니다.

25. MYF 수련회

1960년대 초
MYF 전국연합회 주관으로 하기 수련회가
입석 캠프에서 있었습니다.

본부 교육국 총무는 전종옥 목사님이셨고
청년부 담당 간사는 차현회 목사님이셨습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한 수련회였지만
주로 서울년회 소속 지방 MYF가 참가한 수련회였습니다.

당시 전국연합회장은 김정길 장로(중앙교회)였고
총무는 남상학 장로(왕십리교회)였으며
저는 서울북지방 연합회장 자격으로 참가했었습니다.

당시의 교사로는 본부의 차현회 목사님 외에
감신대 박봉배 목사님,
대전신학대학장 남기철 목사님,
연세대신과대학 김찬국 목사님,
정동교회(서울대물리대교수) 장병림 장로님 등이 맡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15명 정도씩으로 반을 나누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제 담임선생님은 남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때
어느 청년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크리스쳔 청년이 담배 피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기철 목사님이 되물으셨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저는 피워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남목사님은

그러면 자네는 담배를 피워도 괜찮네
피우게

그랬더니 다른 청년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
왜냐하면....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군
그러면 자네는 담배를 피우지 말게

모두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이 사람 저 사람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사람과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사람들이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남기철 목사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든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행할 것이며
그 대신 구원에 대하여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습니다.
........................................................................................

그 후
제가 교회학교 청년부장이 되었을 때
저도 그런 방법으로 청년들을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각각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책임 추궁을 할 때에
청년부장이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어서
불합격 판정이 나면
그것으로 나의 영생은 잘못되고 마는 것이다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고백할 수 있는
스스로의 신앙고백을 만들어야 한다.
...................................................................................
우리는 늘 자유롭게 토론을 하였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부장이나 지도전도사가 잘못 이야기하면
그것을 강하게 지적하며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말이 항상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모든 이들과 지금까지
서로 존경하며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는
거짓없는 마음으로 양보나 타협하지 않고 임한
서로 믿을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
엠마오로 가는 길은 주님과의 만남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노인은 젊은이에게서
스승은 제자에게서
어른은 아이에게서
선배는 후배에게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었더라도
나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전할 선지자를 선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선지자 엘리에 대산 예언을 전한 자는
어린 제자 사무엘이었습니다.

24. 전산초 장로님

찬송가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시편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를 생각하시면서 쓰신
전산초 장로님의 아버님이신 전영택 목사님의 시입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와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ㅡ

이 시를 쓰신 목사님의 심령에는
이미 천국이 임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봄바람이 부는 가정;

그것은
예수를 섬기는 믿음의 가정에서만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어서 가는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금은보화가 있어서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라는 믿음을 갖어야합니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천국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과 시와 믿음은
전산초 장로님의 인생관이 된 듯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전산초 장로님이
남편되시는 분과 팔장을 끼고 다정히 걸으시며
퇴근하여 집으로 가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장로님의 아드님 4형제는
그런 사랑으로 가득한 부모님 밑에서
늘 밝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자라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목사와 장로, 권사 등으로
감리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네 형제 누구를 보아도
어머님의 그 인자하고 사랑스런 미소를 닮은 얼굴과
자랑스러운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에는
집을 예배처소로 선듯 내놓으셨고

늘 교회에서는
상하 전후좌우를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성경말씀과 신앙적인 열정만 가지고
장로님께 어필하려 하다가도
예수님의 모습을 하신 장로님의 웃음띈 얼굴에서
모든 해답을 얻고 스스로 녹아지곤 하였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청년들을 여러 사람 직장을 알선하여 주셨으며
늘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걱정해 주곤 하시었습니다.

청년들이 아무리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화난 얼굴로 나무라시는 일이 없었고
빙그레 웃음 띈 얼굴로 바라보시는 것 만으로
스스로 회개를 하게 만드시었습니다.

그도 인격자이니
내가 구태여 구체적인 지적을 안하더라도
알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교육에는
솔선수범하는 삶의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너무나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산초 장로님을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셨나봅니다.
일찍 우리 곁을 떠나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장로님의 무덤 옆에는
연예인 출신 문오장 목사님의 묘가 나란히 있는데
장로님은 육신이 지고서도
목사님의 벗이 되어 부활의 날을 이야기하고 계신듯 합니다.

23. 시골청년들의 기도

경기도 명지산 밑에 가보면
아름다운 산하에 그림같은 집들이 있고
흐르는 계곡을 따라서 놀이 시설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6.25. 전쟁중
사단규모의 군인들이 전멸한 격전지였던 그곳에는
항상 안개가 자욱히 끼였고
이상 기온으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모두 가난하게 살았으며
동네에는 정신질환자와 알콜중독자와
자살하는 사람들로 폐허가 되다싶이 된 그런 동네였습니다

그곳에는 오래된 감리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교회가 유지되기 어려운 그곳에는
늘 목회자 없이 비어있거나
목회자가 와도 잠깐씩 머물다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예 교회를 잊어버리고
청년들 몇명이 남아서
눈속에 묻힌 교회 바닥에서 기도들을 하였습니다.

주님
차라리 이곳에
큰 교회의 기도원이 들어와서
이 마을이 그 기도원으로 인하여
복음화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 계곡 근처에는
청년들의 기도처럼 기도원이 몇개 생기었고
마을의 여러사람들이 신앙인들이 되었으며
청년은 어느 기도원의 사찰집사가 되었습니다.

기도원이 생기면서
그 계곡에 자주 끼던 안개가 걷히고 기후까지 변하여
인삼밭이 여러곳에 생기었으며
정신질환자가 없어지고 술주정하는 사람들이 없어졌으며
자살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지금은 토지가격도 어지간히 올라
도시사람들의 투자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청년들의 기도는
응답이 되었습니다.

청년은 그 기도원에서 봉사하면서 결혼을 하였고
자녀도 낳아 키우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 쳥년은 눈에 병이 생기어
서울대병원에서 12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눈 다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짐작할 수 있으랴....

그러나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

나이 50이 된 그는 지금
부모가 유산으로 물려준 약간의 재산과
막일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와 함께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 그를 만나면
죄를 지은 마음으로 묻곤합니다.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겠지?

그러나 그 물음은
곧 내 자신에게 되돌아오곤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22. 황요한 목사님

여러해 전에
황요한 목사님이 개척하여 시무하고 계신
역곡에 있는 평안의 교회에서
Tres Dias Reunion 모임이 있었습니다.

역곡 역에서 내린 후
정면을 보고 언덕을 올라 가다가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고
바로 한 번더 좌회전을 하면
주택가 복판에 큰 공원이 보이고
공원 앞에 평안의 교회 건물이 있습니다.

그 교회 김경원 수석장로님은
교회가 건축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회 앞에 공원이 조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의 교회 교인들은
그 공원을 하나님이 평안의 교회에 주신
특별 보너스라고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름에는 유초등부가 예배를 드릴 때
그 공원에 앉아 분반 공부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일예배는 4부로 드리고 있고
수요일 저녁은
지금도 밤 9시에 모이고 있는데
주일예배 처럼 예배당이 꽉차고 있었습니다.
....................................................................
평안의 교회의 본당은
지하 1층과 2층에 있었습니다.
지상 1층에 성가대실이 있고
2층과 3층에 교회학교 사무실과 교회사무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교육관 건물이 따로 있었고
그 건물 지하에 소예배실이 있었으며
그 건물 4층에 목사님 주택이 있었습니다.

황요한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그 교회 권사님이나 교우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편안한 모습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만나면 반갑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은혜가 되며
같이 있기만 하여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고관대작도 없고
이름난 재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그런 직업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힘이
창립예배를 드린지 12년만에
평안의 교회를 그처럼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을까?
..........................................................................
저는 어제 밤
마태복음 16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그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명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신 황요한 목사님은
아버님의 그늘을 뿌리치시고 혼자의 힘으로
개척을 시작한지 12년만에 지금의 교회를
봉헌하셨다고 하십니다.

평안의 교회를
그처럼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힘은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연한 이 기본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황요한 목사님과 교우들의 반석 같은 믿음 위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의 뜻에 의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봉헌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입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분들의 삶의 모습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21. 한애마 권사님

1959년
교회건축을 하기 위하여
목사님이 교인들과 부지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허리가 ㄱ자로 꼬부라지고 머리가 하얗게 센
70 전후의 한애마 권사님도
대야로 흙을 이어나르며 공사를 도왔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인데
한애마 권사님은 교회가 세워질 땅이라고 하면서
매일 저녁 그 땅에 와서 한시간씩 기도를 하셨고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애마 권사님은 지금의 경복궁 동십자각 근처에
아들 내외와 단칸방에 살고 계셨는데

장기금식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아드님이
조금이라도 잡수시라는 권고에 못이겨
시루떡을 아주 조금 잡수시고는 스스로 잘못했다고 하시며
열흘을 추가하여
5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교인들 모두가 걱정들하고 있었는데
한애마 권사님은 건강을 조금씩 회복하시더니
다시 예배에 참석하게 되셨고
교회는 그 후 일년만에 건물을 준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기적은
그 후에 있었습니다.

한애마 권사님의 ㄱ자 허리가 펴지셨고
흰 머리가 다시 검게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두들
장기 금식을 하신 한애마 권사님에게
응답과 함께 크신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드님의 직장이 교회에서 먼곳으로 결정되는 바람에
이사를 가시게 되어서
교회를 집근처로 옮기신 한애마 권사님의 간간 이어지던 소식이
얼마 후 끊기고 말았습니다.

삼청교회는
한애마 권사님의 생명을 건 50일 기도와
목사님과 교우들의 눈물로
반세기 만에
새 건물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삼청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감리교회의 교회마다
목사님과 교우들의 눈물어리고 생명을 건 헌신으로
교회건물을 하나님께 봉헌한 이야기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999년 삼청교회는 두 번째 새 건물을 봉헌하였습니다.

20. 독일군 유태인

한센씨 병 환자촌의 김요석 목사님 설교 테이프 중에서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연합군으로 진군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나치스 군인들을 잡는대로 전부 현장에서 총살을 시키면서
진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치스는 유태인 대학살 이외에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잔인한 마귀로 인정하고 단 한명도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독일군 하나가 잡혀서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독일군은 죽기 직전 소련군 장교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였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의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은 그 독일군은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을 들고
히브리어로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소리를 듣던 소련군 장교도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같은 히브리어로
그 독일군을 따라 함께 외쳤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독일군도 소련군도 모두 유태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자기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신앙관 때문에 즉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유태인들에게는 고난을 당할 때 마다
시편 23편을 암송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노래하면서
믿고 기다렸습니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죽음의 행진을 할 때에도
이 시를 암송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유태인들에게는
이 시가 바로 자기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소련군 장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마귀의 옷을 입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당신에게는 죄가 없다.
이제 자유로이 집으로 돌아가라

고 하면서 석방했다고 합니다.

이글은
독일 유학 때 칼발트에게서 직접 강의를 들으며 신학을 공부하였고
귀국 후 한센씨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있는 촌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그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지내시는 김요석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인인 것을
어떻게 알아 볼수가 있을까요?

서로의 삶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그의 삶의 행위 속에 십자가가 있으면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만나면 반가운 사람,
이야기하면 할수록 은혜가 되는 사람,
아무말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하여 지는 사람
우리는 서로 그런 관계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그것은 우리의 삶속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9. 고명균 목사님

년말이 되면
아내에게 박아지처럼 듣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남처럼 복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요

그러면 의례히 이렇게 답을 하곤합니다.

못받다니요
이 보다 얼마나 더 받아요
넘치게 주셨는데요

하면서 아내를 끌어안곤합니다.
아내는 뚱뚱하여 한 아름에 안을 수가 없습니다.

년말이 되면
목사님들이 제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우들 중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취직을 시켜줄까
사회봉사비를 얼마씩 줄까
기도를 많이 시켜볼까

그러면서도
성공하여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기쁨과 보람, 걱정과 근심을 함께 하시는 듯 합니다.

1979년 봄
신병을 위하여 기도하러 두달간 대한수도원에 있었습니다.

그 때 77세의 고령이신
고명학원 이사장이시던 고명균 원로목사님이
주강사로 오셨습니다.

홍현설 박사님과 감신 동기동창이신 전진 원장님이 사회를 보시면서
고명하고 고명하다는 말이 들어간 성경구절을 읽으셨습니다.

고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저 전진 원장님이 사람 볼줄을 알아
내가 고명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내가 뭐 사례금이나 타먹으려고 이짓하는 줄 알아
내가 이래뵈도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에요
먹고 사는데 하자가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왜 이렇게 됬느냐
평생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드니
하나님이 다 그렇게 만들어주셨어요

하나님이 내게 얼마나 축복을 해주셨는가
첫째 내평생 내 주머니에 돈을 떨이지지 않게 해주셨어요
볼래 ... 자 이거봐

하시면서 양복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5,000원권 하나를 꺼내시고는

봐 여기 있잖아~
기대하던 사람들은 와 웃고 말았습니다.

이봐요
아 마귀자식들도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뭐하러 저 높은 산동네에서
쥐처럼 살아요

열심히 기도하고 나처럼 복을 받아서
멋있게 살아요

과부들도 울면서 혼자 살지 말고 시집들 가
그래서 행복하게 살아요
이 할아버지가 시켰다고 그래

년말이 되면 크리스마스가 오고
또 송구영신의 준비를 합니다.

그럴 때마다
고명균 목사님의 JOKE같은 호령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봐요
아 뭘 그렇게 쪼그라들게 살고 있어
열심히 기도하고 한 번 힘을 내서
뽄떼있게 살아봐요

그것은 아마도
평생을 나와 동행하여 주시는
목사님들의 마음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해봅니다.

18. 이재은 목사님

우리가 목사님을 뵈오러 교회를 찾아가면
늘 문이 열려 있었고
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고는
사모님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어서와요
하고 나오시며 방으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누가 왔어?
하면서 서재에서 책을 보시던 목사님이
우리를 반겨주셨습니다.

서재에 안 계실 때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다가 나오시었습니다.
목사님은 등이 거북이 등이라고들 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책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시느라고
등이 구부러저서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재은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
불타버린 교회의 폐허 위에 천막을 치기 위해 터를 닦을 때,
러닝 셔츠 차림으로 삽을 들고 땀을 흘리며 일하시던 모습은
모든 교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목사님은 설교를 하고 심방 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나 해주시는
거룩한 분으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분이
우리와 함께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와 함께 우리의 방법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격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에서
교인들은 새 힘을 얻게 되었고
천막을 친지 얼마 안되어 새 교회를 짓게 되었으며
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었고
교회를 통하여 많은 일군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힘차고 자신 있게 일하시었습니다.

우리는 그 힘과 용기를 어떻게 갖게 되신 것인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목사님은 중학교(6.25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지 않고
6학년까지 있었음) 대대장이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학교 대대장이라고 하면
조회 때 앞에서 차려, 경례를 큰소리로 외치는
덩치가 큰 학생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6.25 이전의 학교 대대장은 격이 지금보다 높았습니다.
군대 편제를 갖춘 학도호국단의 지휘자로
유사시 군대의 대대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그런 조직의 지휘자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학교 소년단원(Boyscout) 30여명을 인솔하고
개성서 피난을 나오셨다고 합니다.
30여명의 단원들을 인솔하고 부산까지 내려가신 목사님께서는
은영극장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 단원들과 함께 있으면서
부두노동 등으로 숙식을 해결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신학을 공부하시고(감신 정규4년제 제1회 졸업)
군목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목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시면서
삼청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행정에 있어서 매우 조직적이시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기관과 속회와 선교회에 소속되게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교회에 나오면
해야할 일과 직책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교회 뜰이나 주택에 모여
우리가 좋아하는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때의 시간들이 자연스러운 카운슬링이 되었고
각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요한 시간들이 되었으며
후에 청년속회로 발전하게된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였습니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철학에서부터
국가관, 시국관, 동양철학, 서양철학,
심지어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의 문제도 다루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더라도
누구의 말이든지 진지하게 들어 주셨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항상 그 평소 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우리가 평소 토론하던 문제들을
성경을 통하여 해답을 주곤 하시었습니다.

그 때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가난이나 무식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없었고
모두 교회를 통하여
사랑과 용기와 보람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목사님과 함께 하던 그 시절을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청년들은
지금 모두 60대 중반에서 70대 초반 사람들이지만
그 즐거웠던 낙원을 생각하며
가끔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의 청년들은 목사와 장로와 권사들이 되었지만
지금도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재은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실까
생각해 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수요예배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 위경련이 일어나셨습니다.
배를 웅켜 잡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계셨습니다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온 교인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약 5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병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리로 모시고 갈 생각은 않고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침을 잘 노으시던 권사 님이 오시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요 예배에 참석하는 남자어른이 별로 없던 때라
모두 권사님만 쳐다보고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권사 님은 목사님을 진맥하시더니 장경련이라고 하면서
시간이 되었으니 먼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침을 놔드려야겠다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권사 님이 대신 인도하신 수요 예배는 30분만에 끝났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권사 님이 침통을 꺼내어 목사님의 이곳 저곳에 침을 찌르더니
얼마 후 목사님의 통증이 멈추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 일로 두고두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재은 목사님에게
큰 빗을 진 사람의 심정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아파서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으면
목사님이 예배부터 드리고
천천히 권사님을 찾아 침이나 놔주도록 하셨을까?

목사님께서는 분명
얼른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 가셨을 것입니다.

침을 먼저 놓고 나서 목사님이 안정되시는 것을 보고
시간이 좀 늦게 예배를 드리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셨을까?

목사님의 병원비를
교회재정에서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하였나?

예배를 먼저 드리다가
그 사이 목사님이 잘못되셨으면 어쩔 번하였나!

우리들은 전형적인 바리새인 이었다.
교인들은 그 때 일을 늘 부끄러워하였고
자랑하던 신앙에서 겸손해지는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늘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목사님의 설교말씀 제목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생활로 보여주신 그 모습들은
어느 설교 말씀보다도
강하게 내 심령에 들려오는 로고스가 되어있습니다.

17. 교회의 종소리

주택에서 예배당 강도상으로 직접 들어가는 통로에
종탑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후에는 교회 문 옆으로 옮겨 졌지만
6.25 직후까지 그 곳에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반과 5시,
수요일 저녁 7시와 7시반,
주일 아침 10시 반과 11시,
주일 저녁 7시와 7시 반
뗑그렁뗑~
소리를 내며 삼청동 골짜기에 울려 퍼졌습니다.

종은 2번 씩 첬는데
예배시작 30분 전에는 예비종을 첬고
본종은 예배 시작 직전에 첬습니다.

보통은 교회사찰이 첬지만
가끔 우리들이 치면서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꼈었습니다.

뗑그렁뗑~ 뗑그렁뗑~

종을 치면서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마음속으로 외쳐보기도 하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칠 때도 있었습니다.

사찰집사님 외에는 나와 최정호 권사님 아드님인 서효철,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
행방을 알 수 없는 최광진,
소격동 파출소 뒤에 살던 김갑기가 단골 손님 이었습니다.

예비종과 본종은 달랐습니다.
예비종은
20번 치고 한번 쉬고 또 20번치고 한번 쉬면서
대충 2분에서 3분 정도 첬고,
본종은
쉬지 않고 계속 1분에서 2분 정도 쳤습니다.

종을 칠때면
씰구럭쌜구럭~ 함석지붕에서 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동네 사람 아무도 시끄럽다고 항의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만 하여도 시계가 흔치 않은 때라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의 시작시간을 알 수 있었으며
저녁 식사시간을 가름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삼청공원에서 내려 오면서 공원을 벗어나면 종소리가 들렸고
경복궁 입구에서 교회를 향하여 조금 올라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국동 목욕탕 근처와 청와대 고개,
동부삼청동으로 넘어오는 가회동 마루터기에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종소리는
뗑그렁뗑~
늘 맑고 깨끗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소리가 들리는 곳을 삼청교회의 영역으로 선포하는
외침과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 종은 1950년대 말까지
새로 지은 벽돌교회의 종탑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멜로디가 담긴 종소리가 나는 암푸시설을 한 후
주민들의 소음공해 항의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종은
어느 시골교회에 보내졌는데 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감사하다고 특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삼청교회에는
종탑은 있으나 종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삼청교회뿐만 아니라
서울의 어느 교회도 종을 치지 못합니다.

소음공해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염불을 외우던 산속의 절에서는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염불소리를 온 산에 들리게 하는데
종을 처서 교회의 예배를 알리던 교회의 종소리는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누가
그 종소리를 대신 할 것인가요?

주께 두손 모아 비오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쳐 주소서
오 주여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16. 고흥배 목사님

1958년 육사 군목이시던 이재은 목사님(정규 4년제 감신대 1회 동기동창회 총무)이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신 후
그 이듬해인 1959년에 교회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화재로 소실된 교회 부지를 교우들과 함께 고르고 천막을 친 후
건축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군에 입대하면서
유년주일학교 예배는 정OO 장로 혼자서 맡아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그는 올갠을 칠줄 알아서
올갠반주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니
퍽 능율적(?) 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로부터 두달 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온 나는
깜짝 놀라게 발전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신축을 시작하여 지붕과 외벽과 천정이 다 되어 있었고
비록 아직 마루는 깔지 못하였으나
아름다운 교회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교회학교는 교사들로 꽉 차서 분반 공부를 하고 있었고
신학교에 다니는 웬 날씬한 미남자 하나가
교회학교 부장 겸 성가대 지휘자로 맹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신 4중창단 멤버인
고흥배(부평 부광감리교회 원로목사)선생 이었습니다.

고선생은 우리보다 3~5살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우리와 함께 어울리면서
청년부, 교회학교, 성가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일이 아마 목회실습 겸 실습전도사 시무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고선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이 그치질 않았고 청년부나 교회학교나 성가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일할 수 있는 청년들의 인적자원이 부족하던 때이라
전원이 청년부회원, 전원이 교사, 전원이 성가대를 하면서
주일날은 아침에 나오면 모두 저녁 밤이 늦어서야 헤어지곤 하였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청년들을 형제와같이 여기며 사랑하시던 이재은 담임목사님의 수고와
중간 지도자이셨던 고선생의 리더쉽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고선생은 27살에 동갑인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하셨는데
결혼식장에는 감신4중창단이 핔엎(작은 반트럭)에 올갠을 실어갖고 와서
올갠반주와 4중창으로 결혼식 음악 전체를 진행했었습니다.

집이 먼고로
주일날 일이 늦게 끝나면 청년들과 같이 아무데서나 눈을 붙이곤 했었는데,
한번도 고선생의 얼굴에서 힘들다거나 지친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늘 무슨 일을 하던지
즐겁고 기쁜 모습으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고흥배 원로목사님은 부평에서 제일 크고 감리교회서 몇번째 갈
큰 교회(건평 약2,500평)를 증측하시고 은퇴하셨습니다.

공사가 한참 진행중일 때
고목사님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 내 후년이면 은퇴하실 터인데
무엇하러 고생고생하면서 건축을 하십니까 』
(목사님은 그 때 뇌혈관 질환으로 고생을 하고 계셨습니다)

『 아 그래야 다음 사람이 와서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싶을 뿐이야 』

교회가 그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분의 중창단 활동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는 학번별 4중창단이 있었는데
고선생이 활동할 때 몇년간은
대학 중창단 콩클대회에서 우승을 도맡아하곤 했었습니다.

대학부의 감신 4중창단은
고등부의 숭실고등학교중창단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중창단의 무엇이
고선생을 성공적인 지도자로 만들었을까?

다른 사람의 소리와
다른 사람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호흡에
내가 조화를 이루어 가는것

고선생이 삼청교회에 계신동안
온 교회가 평안하고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만나보면 여전히 함박꽃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시면서
입을 열면
금방 무슨 즐거운 소식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다림을 갖게하는 목사님이십니다.

고목사님은 전도사이시던 어머님의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고
목회 초기에는 병으로 고생을 하셨는데도
한번도 낙심하거나,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하는 모습이 없었고
늘 기쁨이 충만하고 삶의 용기가 샘솟듯하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 용기와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전도사님이시던 어머님의 기도와
삶 속에서 늘 동행하시던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 때 그 4중창단이 지금 다 생존들하고 계신지 알 수 없으나
그분이 좋아하면서 같이 불러주던 4중창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는
늘 웃음이 활짝 핀 고흥배 목사님의 얼굴과 함께
내게 기쁨을 갖어다 주는 찬송가입니다.

고흥배 원로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일산에 있는 원로목사님들의 교회에 출석하시다가
지난 2006년 10월 31일 미국 뉴저지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아드님이 목회하시는 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평안한 여생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5. 코메디언 백금녀

살살이 서영춘과 뚱뚱이 백금녀는
유명한 콤비 코메디언입니다.

그 백금녀의 집이 교회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와 수양아들이 삼청교회에 다니었습니다.

후덕하고 인자하게 생기신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으로 예배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늘 딸이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따님에게 교회에 같이 가기를 권했습니다.

[얘, 교회에 같이가자]

[교회에는 왜요?]

[함께 예수를 믿다가 함께 천당에 가자]

[어머니가 신앙이 좋으시니까
난 어머니 천당 가실 때 어머니 발뒤꿈치 붙들고 따라 갈거에요]

[얘, 극장에 들어갈 때 보니까
극장표 한장으로 둘이 못들어 가든구나.
천당도 마찬가지야]

어느 날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끝내고 돌아온 우리들이
지친 몸으로 난로가에서 이얘기저얘기하고 있을 때
백금녀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반가히 맞아 들였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전 부터 교회에 나올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막상 교회에 나오려니까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잘 오셨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교회 한 옆 의자에 앉아 한 없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떠들석하게 농담을 하던 우리가 경건해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만난 백금녀의 모습은
코메디언도 연예인도 아닌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으로서 교회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고민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이혼한 후
언니의 아들중 하나를 수양아들로 삼아 정을 붙이고
새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지방공연이나 외국공연으로 집을 비운 그녀의 집에서
그녀의 수양아들과 청년속 예배를 드리며 놀다가 오곤했었습니다.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모처럼 교회를 찾아온 그녀에게
어떻게 무슨 말로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안타까운 그녀의 모습을 뒤로한 채
우리는 한사람 두사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교회를 찾은 것은
그게 마지막 이었습니다.

집을 멀리 이사간 후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실 때 까지
삼청교회로 예배드리러 나오셨는데

그 후
백금녀가 교회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교회 구석을 두리번 거립니다.

백금녀와 같이 교회를 찾았다가
맥없이 돌아가는 사람은 없는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삼청교회로 보내주신 사람이라면 어떻게하나?

아니 그가 바로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이 만났던 천사이면 어쩌나?

백금녀가 어머니의 소원대로
믿음을 갖고 타계했으면 훨씬 우리들의 마음이 가벼울 터인데.....
........................................................................................

지금도 절망의 마음으로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은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교회의 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다시 절망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목적이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수가 왜 줄어들고 있을까요?
전도가 잘 안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문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려면
기독교인으로서 일정한 멤버쉽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멤버쉽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어느 교회에도 들어가 섞일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멤버쉽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교회를 떠나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멤버쉽이 있는 사람끼리 만나는 사교의 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대로 들어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4. 무명의 전도사님

1979년 4월~6월까지 만 두달 동안
신병 치료의 목적으로 기도를 하기 위하여
철원에 있는 대한수도원에 가있었습니다.

대한수도원에는 유명한 회개바위가 있는데
그 회개바위 가는 길가 큰 바위에 잠언의 말씀이
음각으로 크게 씌여있습니다.

보라
의인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자신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기 전에
자신이 의인인지 악인인지 먼저 살피고
기도의 자리에 임하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저는 신병을 치료받기 위하여 기도하려고
회개바위를 향하다가 문득 그 말씀을 대하고
저 자신을 살피며 회개를 시작하였습니다.

한달 쯔음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팔순이 넘은 노인 전도사님이 오셔서
저와 한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전도사님은 많이 계서도 팔순의 남자 전도사님은 히귀한 경우여서
기회를 보아 한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전도사님은 몇세에 목회를 시작하셨나요?
의외로 전도사님은 조금 늦은 30대에 목회를 시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궁금하여
그런데 왜 아직 목사님이 못되셨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30대에 소명을 받을 때에
성경학교만 나오고 어느 교단에서 전도사님으로 임명되셨다고 합니다.

자기는 전도의 사명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생각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가면 기도처를 정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이 몇십명 뫃여 교회의 모습을 갖추면 좋은 목사님을 청빙하여
그 교회를 맡겨드리고 자기는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정하고 다시 전도를 하곤 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전도사님이 말씀해주시는 교회의 이름들 중에는
유명한 교회가 여러개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되실 생각은 안하셨었느냐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전도사님은
하나님이 자기를 전도사로 사용하여 주신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한번도 목사가 되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전도사님께서는
지금까지 16교회를 개척하였다고 하면서
자기를 사용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 매년 5월 자신이 소명을 받은 달이 되면
꼭 기도원에 와서 일주일씩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3일 금식 중이었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계란 노른 자에 들기름을 타서 잡수시면서
냄새를 피우는 노인이 좀 미운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마치 예수님을 만난 마음으로
그 전도사님과 일주일을 보내었습니다.

저는 평생토록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문득문득 그 전도사님 생각이 날때마다
아무 한일이 없는 신앙생활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 전도사님은 물론 지금쯔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 안밖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인자한 모습의 그 팔십대 전도사님을 떠올려 봅니다.

그 전도사님이 요즈음의 이야기들을 들으시면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실까

오래 전에 그 전도사님의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왠지
그 전도사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13. 양로원의 사모님

1980년 전후 크리스마스 기간에
교회 남선교회에서 어려운 이웃 돕기를 하였습니다.

그때 문득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았던
김진호 원로목사님의 사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사모님은 청운양로원에 계셨습니다.
저는 다른 교우와 함께
사모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우리는 사모님에게 절을 하며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해 드리는 작은 위로금은 제쳐두시고
나를 위하여 기도 좀 해주세요
너무 외로워요
늙어 이렇게 혼자 고아처럼 있게될 줄 몰랐어요
하며 손을 붙들고 울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사모님의 손을 붙들고
함께 울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모님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가까운 곳에 있는 궁정교회 청년들이
사모님이 돌아가실 때 까지
매주 예배가 끝나면 사모님을 찾아뵙고

우리가 할머니의 손자에요
하면서 함께 놀아드렸다고 합니다.

얼마 후
사모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김진호 목사님과 함께
주님 곁에서 안식하시리라 믿습니다.

매년 겨울이 되면
김진호 목사님 사모님의 우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다시는 그런 외로운 목사님이나 사모님이
우리 감리교회에 계시지 않아야 할터인데....

12. 조현제 장로님

어느날
서울 성동지방의 어느 교회에
년로하신 장로님 한분이 새로 오셨습니다.

키가 크고 인자한 모습의 그 장로님은
평생 농사를 지으시느라고 얼굴이 검게 타고
손에는 굳은 살이 박혀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다른 교회에서 누가 새로 이명해 오면
한 3년 동안은 정착하느라고 곤욕을 치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사람이 그 직분에 걸맞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두들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예배와 모임은 제대로 참석하고 있는지?
새벽기도는 하고 있는지?
헌금생활을 어떻게 하며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는지?

그러다가 정착을 하기도 하고
대개의 경우에는 토박이 교인들의 텃세에 밀려 정착을 하지 못하고
1~2년 내에 또 다른 교회로 떠나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조현제 장로님은 오신지 얼마 안되어
모든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셨습니다.

조현제 장로님은
주일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걸레를 빨아가지고 나와서
교회 본당과 복도와 각 사무실 등
이곳저곳을 걸레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찰이 따로 있으니까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여도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하면서
주일마다 걸레질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직접 교회를 걸레로 닦는데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남자 권사님 한분이 자청하여
조현제 장로님을 따라다니며 걸레질을 같이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교회학교나 예배당 등 모든 곳에서
조현제 장로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농사지으시느라고 고생하고 사신 것이 안타까워
자녀들이 함께 살자고 하여 서울에 와서 사시던 장로님은
한 3년 후 도로 진천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시면서
장로님을 따라다니며 배우던 권사님에게 대걸레를 물려주며
평생 이것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나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지금도 주일이면 그 교회에서 걸레질을 합니다.
교회학교의 유년부 부장을 오래하고 있으며
어린이전도협회 이사로 봉사하고 있고
뜨레서디아스가 열리는 곳에서는 유명한 봉사자가 되었습니다.

조현제 원로장로님이
지금까지 살아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밖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조현제 원로장로님이 생각이 납니다.

과연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11. 농촌목회하시는 김목사님의 이야기

농촌 교회 목회자 사례비 삼십만원
사모님은 좀더 받기를 바라고 목사님은 괜찮다 하고
오십만원 만 받아도 한이 없겠다 생각하는 목사님 사모님 많죠.

교회 개척하고 2년 지나 교회 이전하면서
이전 예배 겸 설립 예배드리며 오셔서 설교해 주신
존경하는 목사님에게 사례비를 십오만원 드렸었습니다.

적다 생각할 수 있겠다 생각되었지만
당시 한달 생활비로 십오만원 이상 써 본 일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드렸는데 늘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도 형편은 비슷하지만
굶지 않고 견딜 수 있어 감사할 뿐입니다.

이글에
저는 이렇게 다시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눈물로 받으시고
늘 김목사님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김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입니다.

보통 농촌교회의 경우
일년 예산의 절반이 추수감사절 헌금이라고하니
그 나머지 기간 동안
교회와 목사님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우실까
짐작을 해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어차피 기독교는 대형교회나 유명한 사람들에 의하여
전승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의 온전한 크리스쳔을 만들기 위하여
삶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선지자들에 의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내용은 이론이나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 계시를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삶으로 사랑을 실천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용도 목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분들의 설교 내용이나 지식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교인을 위하여
가난을 무릅쓰고
그 영혼을 위하여 도고하며 목회하시는 소형교회 목사님이나
수만명의 교인들을 목회하시는 대형교회 목사님의 모습 속에서
같은 거룩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이 뫃여
얼마나 웅장한 예배를 드렸는가 보다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었는가가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라고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솔선수범을 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인 크리스쳔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10월 5일 금요일

10. 새성전을 봉헌하는 어느 목사님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저는 교회학교 청년부와 대학부 부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거리의 데모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웨침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거리에서 그들의 웨침을 들으며 따라다녔고
저녁에 교회에 와서는 데모를 하다가 혹 누가 다칠까봐
우리는 몸으로 하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자고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친구들은 거리에서 다치고 죽고 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울고들 있었습니다.

그때 이웃교회에 있던 전도사님 한분은
그때의 일들로 옥고를 치른 후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노동자가 되어 일하시던 그분은
친구의 소개로 신학교 후배와 결혼하여 생활하던 중
전도사였던 아내의 권유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비록 못생기고 병든 교회이지만
그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나도 교회를 사랑하리라 결심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한지 약 20년이 채못되어
그 목사님은 새 성전을 건축하고 얼마후면
봉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영성훈련 지도자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불의한 일을 보면
의분을 참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더 이상
교회를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바로
교회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하며
우리들 자신을 채찍질하여 경건한 모습의 크리스쳔이 되었을 때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군 생활을 하면서 3.15 부정선거와
4.19를 경험하였습니다.

학보병으로 제대하고 복학하였을 때
5.16 군사혁명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사회정의를 꼭 실천할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복학한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소련의 소비에트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교수에기 질문하고
이를 변명하는 교수와 다투다가
진리가 아닌 학문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MYF 지방연합회와 전국연합회 임원으로 있을 때에는
다른 임원들과 함께 총회를 참관하면서 흥분하기도 하였었습니다.

그 후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직장에서 은퇴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몇년 후면 시무를 그만두고
은퇴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
아직도 세상은 혼란스럽고
세상을 아름답고 의롭게 사는 지혜를 구하는 교우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
주님의 사랑과 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 뿐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감리교회에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10명의 목사님들이 계신 한
우리 감리교회는 발전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님들이 저에게 들려주신
예언의 말씀들입니다.

9. 서울 엠마오 가는 길 6기

일영 연수원에서 열리는
Seoul Walk To Emmaus를 위하여
매주 한번씩 연수원에서 준비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5~6명씩 조를 짜서 나눔과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난 10월 준비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다른 장로님 한분과 목사님 3분이 있는 조로 편성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큰 교회와 중형교회 목사님들이 함께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년장자인 저부터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있었던 영적 체험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전보다 성경보는 시간이 적어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적어져서
걱정이라고들 말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새벽기도를 위하여 준비기도를 하고
새벽기도시간에 기도를 하며
하루를 지내는 동안 심방시간에 기도를 하고
심방을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며
설교를 위하여 준비기도를 하고
삶 전체가 기도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갈 수록 목사님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평신도중 어느 누누가 이런 목사님들의 기도만큼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새벽기도를 위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심방을 위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심도있게 연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열심있는 평신도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은
평신도인 저에게 년장자에게의 예를 갖추어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저는 그 기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감리교회에는 훌륭한 인격의 목사님들과
큰 믿음의 신앙을 가지신 감리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고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님들의 열정이
Walk To Emmaus 기간 동안
모두 함께 주님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모든 교회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뜨거운 체험을 갖었던 일이 체험되어지는
거룩한 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감리교회 교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8. 선생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

몇년 전,
기도원 집회에서 190cm의 큰 키에
늘 반달 웃음을 웃는 H교회 J군을 만났습니다.

방사선과 기사의 직업을 갖고 있는 그는
Song Team 중에서도 기타보다는 Drum을 특별히 잘치는
30대 초반의 청년인데

그의 노래 반주하는 모습을 보면
동그란 모습의 작은 안경을 쓰고
늘 기쁜 모습으로 Drum을 치곤합니다.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즐겁고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은 참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를 잘 아는 같은 교회의 장로님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 장로님의 걱정과는 달리 늘 밝고 명랑하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저렇게 기쁘고 행복한 젊은이로 가르치고 키워 놨을까?

한번은 그에게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 누구이셨나?]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J 목사님이구요
중고등부 때 선생님은 S 목사님이에요

그 두분 목사님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으로 계실 때
내 신앙의 기초를 만들어 주신 분들 이에요]

그는 서슴치 않고
나는 누구누구의 제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J 목사님은 현재 서울시내 교회 교육담당 부목사님이고
S 목사님은 현재 뉴질랜드에서 이민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입니다.

두 분 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계시거나
영성훈련 강사로 활동하시는 감리교회 목사님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우리 교회 믿음의 후배들은 ?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쳐 주고
선배가 후배를 지도해 줍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선배이기도 합니다.

60 여년의 세월동안
나는 어떤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나?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소개해 주었나?
나로 인하여 실족한 후배는 없었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선배에게서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결국 믿음이란
먼저 체험한 자가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내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선배인가요?

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J군 같은 형제,
늘 확신 속에 후배를 지도할 수 있는
40세 전후의 J목사님과 S목사님 같은 분...

나이와 관계없이 그 분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고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기쁨과 참 평안을 얻지 못하는 한 ,
그분들은 영원히 나의 스승이고 선배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7. 한기모 목사님

환갑이 지나신 함경도 출신의 한기모 목사님이
삼청교회에 부임해 오신 것은 1955년 이었습니다.

천안지방에서 감리사를 지내신 중진 목사님이
생철지붕의 작은 판자집 교회로 오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멋쟁이이셨습니다.
커다란 키에 늘 인자한 미소를 띄고 계셨으며
코넷을 잘 연주하셨는데
부임하시는 날 코넷으로 찬송가를 연주해 주셨습니다.

위로 따님 두분이 있으셨고
아래로 아드님 세분이 있으셨는데
목사님을 닮아서 모두 음악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둘째 따님은
가끔 특별찬송으로 은혜를 받게하였고
목사님의 가족들과 교우들이 합하여
비로소 모양을 갖춘 성가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많이 부흥하였고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많이 활성화 되었었습니다.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부임지를
왜정시대 기독교 학살사건으로 유명한
제암리교회를 택하였습니다.

모두 두려워 가기 꺼려하던 곳을
자청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유명한 조신일 목사님과
친구사이 이셨습니다.
그 아드님인 테너 조진걸 씨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안구를 기증하기로 하고
연세대 의대에서 수술대에 누어 기다리던 중
조진걸 씨의 경우 안구 이식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는
의사들의 최종 진단을 받고 중단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생전에 연세대 의과대학에 사후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 의과대학에 가면
한기모 목사님의 유골이 표본으로 정리되어
진열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큰 사위가 군목으로 계셨고
아드님 중에서 목사가 된 분은 없었습니다.

그 중
목사님에게 제일 귀여움을 받던 막내 아드님이
미국에 이민하여 컴퓨터 기술자로 크게 성공하여 풍요로웁게 살다가
의과대학 연구용으로 보존되어 있는 아버님의 유골을 보고

아주 고귀하고 거룩한 아버님의 삶을 생각하며
그 모든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늦게 목사(미국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아드님 목사님은
소천하시기 전의 늙으신 모습의 아버님 사진과
표본으로 진열된 아버님의 유골사진을
함께 가슴 속에 늘 갖고 다니며
어려울 때 마다 아버님의 사진을 꺼내보면서
새로웁게 다짐을 하곤 한다고 합니다.

나는 고생스러운 가난한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발자취를 따라 거룩한 길을 택하였다고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옛 교우들에게는
아버님 생전에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이 계시면
아버님 대신 사죄를 청하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시면서
최선을 다하고 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교회가 작고 가난한 교회라
한기모 목사님과 목사님의 가족들은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한기모 목사님의 아드님 목사님은
어려서 자란 삼청교회가
그리고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는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죽음 이후 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의 모든 것을 헌신하신
한기모 목사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려 살길을 주었다
내 몸을 드리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드리었건만 날 무엇 주느냐

6. 할렐루야 집사

삼청교회에 다니던 분들 중에
할렐루야 집사로 알려져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그냥 집사님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외부에서는 할렐루야 집사라고들 불렀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에
점심시간이면 크리스쳔 직원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수요일 예배와 주일 저녁예배 시간에는
다른 교회에 다니며 간증과 찬양을 하였습니다.

회사의 차장이던 그분은 부장 진급을 앞두고
국장을 찾아가서 진급 누락부탁을 하였습니다.
이유인 즉,
지금은 차장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여러가지 교회봉사를 할수가 있는데
부장이 되면 그렇게 할 시간이 없으니
꼭 누락 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국장은
평생 진급 부탁은 많이 받았어도
진급 누락부탁은 처음받았다고 하면서
참 기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일학교 유초등부와 중등부에서
교사와 부장으로 봉사를 많이 하였는데
반을 맡았을 때에는 5~6명의 반을
수개월 내에 20~30명의 반으로 키우곤 하였습니다.

어린이 전도협회 이사이기도 한 그분은
끝내 회사를 조기 은퇴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수년 전 여름
전곡 벽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분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군부대 앞에 간판 없는 여인숙 방을 두개 빌려서
큰 방은 예배당으로 쓰고 작은 방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어린이 전도협회 총무 강갑중 목사님이 오셔서
어린이 성경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1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주일 동안 모두 열심이었습니다.

어른 교인들은 10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간판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간판을 하나 만들어 봉헌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의 셋집에 교회간판을 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회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교회건물을 건축한 후에 그 때 간판을 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간판을 달았던 교회가 어디 있었느냐고 하면서
간판이 없어도 이곳에 교회가 있다는것을
인근 십리 안팎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근처에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곳이 많아서
주일이면 6개처를 다니며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교회 6곳을 시무하는 셈이 됩니다.

서울에서 이사오신 한 권사님이
주일 저녁 예배와 수요예배에 가끔 빠지게 되니까
대뜸 충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시려면 권사을 그만 두시던가
아니면 다른 교회로 옮기십시요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려면
예배에 빠지시면 안됩니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그러다가 정말 안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바른 것을 가르치려고 목사가 되었는데
비위를 맞추려면 굳이 목사가 될 이유가 없지요
도시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이유도
도시에는 훌륭한 공부를 하신 분이 많으시니까
나는 그런 분들이 가지않는 벽촌에 있으려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도 목사가 된지 약 2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다니며 원주민 대상 집회를 하면서
약 6만명 정도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늘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후
시무를 끝내고 은퇴를 한 후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을 끝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과연 무엇을
주님 앞에 보고 드릴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5. 임진국 목사님

6.25.전쟁 중
서울은 1950년 6월~9월, 1951년 1월에서 수개월
두 차례 공산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 하고서도
한강 이남 지역은 자유왕래를 허락하고
한강 이북 지역은 수개월 동안 통행을 제한하였습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가족들 중 대표로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은행에 다니시던 숙부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삼청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원로목사님이시던 임진국 목사님이셨습니다.

체구가 좀 크시고 미성의 음성을 가지셨으며
늘 넉넉한 미소로 교인들을 맞아 주시곤 하셨습니다.

청운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보이스카욷에서 활약하시던
임한익 원로장로님의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과
장로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생각해보면
아버님이신 임진국 목사님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는 교회의 숫자보다 목사님의 숫자가 적어서
목사님 한분이 여러교회를 함께 치리하시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서울이 완전 자유왕래가 허용되기 전이라
원로목사님이시던 임진국 목사님이 삼청교회를 치리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찬송가 중 이몸의 소망 무엔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에도, 저녁 예배시간에도, 수요일과 속회 시간에도
소년부 예배시간에도 이몸의 소망 무엔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그당시 우리는
목사님이 노인이시라 다른 찬송은 잘 모르셔서
그 찬송만 자주 부르시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한참 전쟁 중이던 때
언제 다시 피난보따리를 메고 피난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삶의 미래를 계획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던 때에
이 찬송처럼 가장 은혜가 되는 찬송이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임진국 목사님께서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망중에 주님을 믿고 기다리자는 말씀을
찬송가를 통하여 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후 삼청교회 교인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임진국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찬송가
이 몸의 소망 무엔가를 부르며 다시 힘을 얻곤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찬송을
모든 분들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1)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두리라

3)
세상의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4)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우리들은 그때 부르던 이 찬송 속에
엠마오로 함께 걷고 있던 주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시던
사랑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의 임진국 목사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우리 곁에 오신

상수리나무 밑에서 아브라함이 만났던 주님의 사자

그리고
모세에게 떨기나무에서 음성으로 들려 주셨던 분

바로
우리 주님의 임재이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주님이
지금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 현동완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이나 한경직 목사님은 잘 알아도
현동완 선생님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그러나
6.25. 직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몇번 장관직에 초빙될 만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교회의 직분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 밑에서 교육을 받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감사함으로 할것이지
교회의 직분이 왜 필요하냐고 하시면서
교회에서 직분을 갖지 말고 봉사하라고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6.25. 전쟁으로 종로에 있던 YMCA건물이 파괴되었을 때
그 뒷 마당에 요즘의 콘테이너와 비슷한 것으로 지은
작은 건물이 몇개 있었는데
지금의 새 건물이 지어질 때 까지 그곳에서 활동들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소년부에서는 6.25. 전쟁으로 어려움을 당한 아이들을 뫃아
난지도에 Boys Twon을 건설하여 수용하였고
지금까지 그 사업이 이어지고 있으며
매주 일정한 시간 모여서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주 엄하게 가르치시면서도
욕을 사용하는 일이 없으셨고
「그 사람 참 몹쓸 사람이군」
이 제일 큰 꾸지람이었다고 합니다.


큰 스승님의 언어에는 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보다고 여름 수련회를 갔을 때면
밤새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소리를 듣고
더욱 마음으로 부터 신뢰와 존경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현동완 선생님에게서 교육을 받은 소년들은
후에 사회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제자들 약 20명이 가끔 뫃여
선생님의 가르침을 회고하며 옛정을 나눈다고 하는데
그 중 교육자 한분과 사업가 한분이 장로가 되어서
모두 그들을 보고
자네들은 선생님의 유훈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야
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두분 이외에는 모두 집사가 된분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사회사업 분야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총무 은퇴 후
경기도 어느 농촌 단칸 방에서 혼자 사시다가 별세하셨는데
너무 가난하여
제자들이 직접 염을 하여 인근 산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생전에
자기가 죽거든 아무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슨 큰 일을 한것이 있다고
비석을 세우느냐 절대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아주 작은 비석을 세워 선생님의 산소를 표시해 놓았다고 합니다.

현동완 선생님에게는 목사님이신 아드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이민을 보낸 후 총무이실 때에도
일체 아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서
아주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현동완 선생님은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이상재 선생님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현동완 선생님이 생각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학교 때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와
현동완 선생님의 제자 서울 금호동 서민약국 주인과
YMCA에서 활동하시던 숙부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