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5일 금요일

10. 새성전을 봉헌하는 어느 목사님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저는 교회학교 청년부와 대학부 부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거리의 데모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웨침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거리에서 그들의 웨침을 들으며 따라다녔고
저녁에 교회에 와서는 데모를 하다가 혹 누가 다칠까봐
우리는 몸으로 하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자고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친구들은 거리에서 다치고 죽고 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울고들 있었습니다.

그때 이웃교회에 있던 전도사님 한분은
그때의 일들로 옥고를 치른 후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노동자가 되어 일하시던 그분은
친구의 소개로 신학교 후배와 결혼하여 생활하던 중
전도사였던 아내의 권유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비록 못생기고 병든 교회이지만
그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나도 교회를 사랑하리라 결심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한지 약 20년이 채못되어
그 목사님은 새 성전을 건축하고 얼마후면
봉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영성훈련 지도자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불의한 일을 보면
의분을 참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더 이상
교회를 비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바로
교회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기도하며
우리들 자신을 채찍질하여 경건한 모습의 크리스쳔이 되었을 때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군 생활을 하면서 3.15 부정선거와
4.19를 경험하였습니다.

학보병으로 제대하고 복학하였을 때
5.16 군사혁명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사회정의를 꼭 실천할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복학한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소련의 소비에트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교수에기 질문하고
이를 변명하는 교수와 다투다가
진리가 아닌 학문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MYF 지방연합회와 전국연합회 임원으로 있을 때에는
다른 임원들과 함께 총회를 참관하면서 흥분하기도 하였었습니다.

그 후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직장에서 은퇴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직분도 몇년 후면 시무를 그만두고
은퇴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반성해보고 있습니다.
............................................................................................
아직도 세상은 혼란스럽고
세상을 아름답고 의롭게 사는 지혜를 구하는 교우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
주님의 사랑과 의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 뿐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감리교회에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10명의 목사님들이 계신 한
우리 감리교회는 발전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님들이 저에게 들려주신
예언의 말씀들입니다.

9. 서울 엠마오 가는 길 6기

일영 연수원에서 열리는
Seoul Walk To Emmaus를 위하여
매주 한번씩 연수원에서 준비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5~6명씩 조를 짜서 나눔과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난 10월 준비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다른 장로님 한분과 목사님 3분이 있는 조로 편성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큰 교회와 중형교회 목사님들이 함께하셨습니다.

목사님들은 년장자인 저부터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있었던 영적 체험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전보다 성경보는 시간이 적어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적어져서
걱정이라고들 말하셨습니다.

그 후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새벽기도를 위하여 준비기도를 하고
새벽기도시간에 기도를 하며
하루를 지내는 동안 심방시간에 기도를 하고
심방을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며
설교를 위하여 준비기도를 하고
삶 전체가 기도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갈 수록 목사님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평신도중 어느 누누가 이런 목사님들의 기도만큼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새벽기도를 위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심방을 위하여 성경을 읽으면서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심도있게 연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열심있는 평신도가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은
평신도인 저에게 년장자에게의 예를 갖추어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저는 그 기간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감리교회에는 훌륭한 인격의 목사님들과
큰 믿음의 신앙을 가지신 감리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고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님들의 열정이
Walk To Emmaus 기간 동안
모두 함께 주님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모든 교회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뜨거운 체험을 갖었던 일이 체험되어지는
거룩한 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감리교회 교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8. 선생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

몇년 전,
기도원 집회에서 190cm의 큰 키에
늘 반달 웃음을 웃는 H교회 J군을 만났습니다.

방사선과 기사의 직업을 갖고 있는 그는
Song Team 중에서도 기타보다는 Drum을 특별히 잘치는
30대 초반의 청년인데

그의 노래 반주하는 모습을 보면
동그란 모습의 작은 안경을 쓰고
늘 기쁜 모습으로 Drum을 치곤합니다.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즐겁고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은 참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를 잘 아는 같은 교회의 장로님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 장로님의 걱정과는 달리 늘 밝고 명랑하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를
저렇게 기쁘고 행복한 젊은이로 가르치고 키워 놨을까?

한번은 그에게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 누구이셨나?]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J 목사님이구요
중고등부 때 선생님은 S 목사님이에요

그 두분 목사님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으로 계실 때
내 신앙의 기초를 만들어 주신 분들 이에요]

그는 서슴치 않고
나는 누구누구의 제자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J 목사님은 현재 서울시내 교회 교육담당 부목사님이고
S 목사님은 현재 뉴질랜드에서 이민목회를 하고 계신 목사님입니다.

두 분 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계시거나
영성훈련 강사로 활동하시는 감리교회 목사님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우리 교회 믿음의 후배들은 ?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쳐 주고
선배가 후배를 지도해 줍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선배이기도 합니다.

60 여년의 세월동안
나는 어떤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나?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소개해 주었나?
나로 인하여 실족한 후배는 없었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지식은 선배에게서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결국 믿음이란
먼저 체험한 자가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내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선배인가요?

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J군 같은 형제,
늘 확신 속에 후배를 지도할 수 있는
40세 전후의 J목사님과 S목사님 같은 분...

나이와 관계없이 그 분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고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기쁨과 참 평안을 얻지 못하는 한 ,
그분들은 영원히 나의 스승이고 선배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7. 한기모 목사님

환갑이 지나신 함경도 출신의 한기모 목사님이
삼청교회에 부임해 오신 것은 1955년 이었습니다.

천안지방에서 감리사를 지내신 중진 목사님이
생철지붕의 작은 판자집 교회로 오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멋쟁이이셨습니다.
커다란 키에 늘 인자한 미소를 띄고 계셨으며
코넷을 잘 연주하셨는데
부임하시는 날 코넷으로 찬송가를 연주해 주셨습니다.

위로 따님 두분이 있으셨고
아래로 아드님 세분이 있으셨는데
목사님을 닮아서 모두 음악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둘째 따님은
가끔 특별찬송으로 은혜를 받게하였고
목사님의 가족들과 교우들이 합하여
비로소 모양을 갖춘 성가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많이 부흥하였고
중고등부와 청년부가 많이 활성화 되었었습니다.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부임지를
왜정시대 기독교 학살사건으로 유명한
제암리교회를 택하였습니다.

모두 두려워 가기 꺼려하던 곳을
자청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유명한 조신일 목사님과
친구사이 이셨습니다.
그 아드님인 테너 조진걸 씨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안구를 기증하기로 하고
연세대 의대에서 수술대에 누어 기다리던 중
조진걸 씨의 경우 안구 이식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는
의사들의 최종 진단을 받고 중단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생전에 연세대 의과대학에 사후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셨습니다.
지금도 연세대 의과대학에 가면
한기모 목사님의 유골이 표본으로 정리되어
진열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큰 사위가 군목으로 계셨고
아드님 중에서 목사가 된 분은 없었습니다.

그 중
목사님에게 제일 귀여움을 받던 막내 아드님이
미국에 이민하여 컴퓨터 기술자로 크게 성공하여 풍요로웁게 살다가
의과대학 연구용으로 보존되어 있는 아버님의 유골을 보고

아주 고귀하고 거룩한 아버님의 삶을 생각하며
그 모든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고
늦게 목사(미국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아드님 목사님은
소천하시기 전의 늙으신 모습의 아버님 사진과
표본으로 진열된 아버님의 유골사진을
함께 가슴 속에 늘 갖고 다니며
어려울 때 마다 아버님의 사진을 꺼내보면서
새로웁게 다짐을 하곤 한다고 합니다.

나는 고생스러운 가난한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의 발자취를 따라 거룩한 길을 택하였다고 생각하면서
힘을 내곤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옛 교우들에게는
아버님 생전에 혹시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이 계시면
아버님 대신 사죄를 청하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시면서
최선을 다하고 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교회가 작고 가난한 교회라
한기모 목사님과 목사님의 가족들은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한기모 목사님의 아드님 목사님은
어려서 자란 삼청교회가
그리고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는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죽음 이후 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의 모든 것을 헌신하신
한기모 목사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려 살길을 주었다
내 몸을 드리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드리었건만 날 무엇 주느냐

6. 할렐루야 집사

삼청교회에 다니던 분들 중에
할렐루야 집사로 알려져 있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그냥 집사님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외부에서는 할렐루야 집사라고들 불렀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에
점심시간이면 크리스쳔 직원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수요일 예배와 주일 저녁예배 시간에는
다른 교회에 다니며 간증과 찬양을 하였습니다.

회사의 차장이던 그분은 부장 진급을 앞두고
국장을 찾아가서 진급 누락부탁을 하였습니다.
이유인 즉,
지금은 차장이라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여러가지 교회봉사를 할수가 있는데
부장이 되면 그렇게 할 시간이 없으니
꼭 누락 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국장은
평생 진급 부탁은 많이 받았어도
진급 누락부탁은 처음받았다고 하면서
참 기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일학교 유초등부와 중등부에서
교사와 부장으로 봉사를 많이 하였는데
반을 맡았을 때에는 5~6명의 반을
수개월 내에 20~30명의 반으로 키우곤 하였습니다.

어린이 전도협회 이사이기도 한 그분은
끝내 회사를 조기 은퇴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수년 전 여름
전곡 벽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그분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군부대 앞에 간판 없는 여인숙 방을 두개 빌려서
큰 방은 예배당으로 쓰고 작은 방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어린이 전도협회 총무 강갑중 목사님이 오셔서
어린이 성경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1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주일 동안 모두 열심이었습니다.

어른 교인들은 10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간판이 없는 것이 안타까워서
간판을 하나 만들어 봉헌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의 셋집에 교회간판을 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교회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교회건물을 건축한 후에 그 때 간판을 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간판을 달았던 교회가 어디 있었느냐고 하면서
간판이 없어도 이곳에 교회가 있다는것을
인근 십리 안팎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근처에서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곳이 많아서
주일이면 6개처를 다니며 예배를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교회 6곳을 시무하는 셈이 됩니다.

서울에서 이사오신 한 권사님이
주일 저녁 예배와 수요예배에 가끔 빠지게 되니까
대뜸 충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으시려면 권사을 그만 두시던가
아니면 다른 교회로 옮기십시요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려면
예배에 빠지시면 안됩니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그러다가 정말 안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바른 것을 가르치려고 목사가 되었는데
비위를 맞추려면 굳이 목사가 될 이유가 없지요
도시로 나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이유도
도시에는 훌륭한 공부를 하신 분이 많으시니까
나는 그런 분들이 가지않는 벽촌에 있으려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도 목사가 된지 약 2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다니며 원주민 대상 집회를 하면서
약 6만명 정도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늘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후
시무를 끝내고 은퇴를 한 후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을 끝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과연 무엇을
주님 앞에 보고 드릴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5. 임진국 목사님

6.25.전쟁 중
서울은 1950년 6월~9월, 1951년 1월에서 수개월
두 차례 공산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 하고서도
한강 이남 지역은 자유왕래를 허락하고
한강 이북 지역은 수개월 동안 통행을 제한하였습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가족들 중 대표로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은행에 다니시던 숙부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삼청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원로목사님이시던 임진국 목사님이셨습니다.

체구가 좀 크시고 미성의 음성을 가지셨으며
늘 넉넉한 미소로 교인들을 맞아 주시곤 하셨습니다.

청운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보이스카욷에서 활약하시던
임한익 원로장로님의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과
장로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생각해보면
아버님이신 임진국 목사님의 모습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는 교회의 숫자보다 목사님의 숫자가 적어서
목사님 한분이 여러교회를 함께 치리하시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서울이 완전 자유왕래가 허용되기 전이라
원로목사님이시던 임진국 목사님이 삼청교회를 치리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찬송가 중 이몸의 소망 무엔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주일 예배시간에도, 저녁 예배시간에도, 수요일과 속회 시간에도
소년부 예배시간에도 이몸의 소망 무엔가를 자주 부르셨습니다.

그당시 우리는
목사님이 노인이시라 다른 찬송은 잘 모르셔서
그 찬송만 자주 부르시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한참 전쟁 중이던 때
언제 다시 피난보따리를 메고 피난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삶의 미래를 계획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던 때에
이 찬송처럼 가장 은혜가 되는 찬송이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임진국 목사님께서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소망중에 주님을 믿고 기다리자는 말씀을
찬송가를 통하여 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후 삼청교회 교인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임진국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찬송가
이 몸의 소망 무엔가를 부르며 다시 힘을 얻곤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찬송을
모든 분들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1)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후렴)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2)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두리라

3)
세상의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4)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우리들은 그때 부르던 이 찬송 속에
엠마오로 함께 걷고 있던 주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시던
사랑의 말씀이 들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의 임진국 목사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우리 곁에 오신

상수리나무 밑에서 아브라함이 만났던 주님의 사자

그리고
모세에게 떨기나무에서 음성으로 들려 주셨던 분

바로
우리 주님의 임재이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의 그 주님이
지금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 현동완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이나 한경직 목사님은 잘 알아도
현동완 선생님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그러나
6.25. 직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몇번 장관직에 초빙될 만큼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교회의 직분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 밑에서 교육을 받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데 감사함으로 할것이지
교회의 직분이 왜 필요하냐고 하시면서
교회에서 직분을 갖지 말고 봉사하라고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6.25. 전쟁으로 종로에 있던 YMCA건물이 파괴되었을 때
그 뒷 마당에 요즘의 콘테이너와 비슷한 것으로 지은
작은 건물이 몇개 있었는데
지금의 새 건물이 지어질 때 까지 그곳에서 활동들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소년부에서는 6.25. 전쟁으로 어려움을 당한 아이들을 뫃아
난지도에 Boys Twon을 건설하여 수용하였고
지금까지 그 사업이 이어지고 있으며
매주 일정한 시간 모여서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주 엄하게 가르치시면서도
욕을 사용하는 일이 없으셨고
「그 사람 참 몹쓸 사람이군」
이 제일 큰 꾸지람이었다고 합니다.


큰 스승님의 언어에는 욕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보다고 여름 수련회를 갔을 때면
밤새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소리를 듣고
더욱 마음으로 부터 신뢰와 존경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현동완 선생님에게서 교육을 받은 소년들은
후에 사회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제자들 약 20명이 가끔 뫃여
선생님의 가르침을 회고하며 옛정을 나눈다고 하는데
그 중 교육자 한분과 사업가 한분이 장로가 되어서
모두 그들을 보고
자네들은 선생님의 유훈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야
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두분 이외에는 모두 집사가 된분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사회사업 분야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은 총무 은퇴 후
경기도 어느 농촌 단칸 방에서 혼자 사시다가 별세하셨는데
너무 가난하여
제자들이 직접 염을 하여 인근 산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생전에
자기가 죽거든 아무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슨 큰 일을 한것이 있다고
비석을 세우느냐 절대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라고 하셨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아주 작은 비석을 세워 선생님의 산소를 표시해 놓았다고 합니다.

현동완 선생님에게는 목사님이신 아드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이민을 보낸 후 총무이실 때에도
일체 아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서
아주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현동완 선생님은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이상재 선생님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현동완 선생님이 생각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학교 때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와
현동완 선생님의 제자 서울 금호동 서민약국 주인과
YMCA에서 활동하시던 숙부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한 것입니다.)

3. 이하영 목사님

6.25. 전 까지
내가 주일학교 유초등부에 다닐 때에
삼청교회에서 시무하시던 목사님입니다.

한복에 두루마기를 주로 입으시고
양복을 입으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처럼 깡마른 체구의 목사님은
키는 작지 않은 보통키 이셨으며
머리를 기르지 않으시고 늘 짧은 머리이셨습니다.

왜 머리를 기르지 않으시고 짧은 머리를 하셨을까?
머리를 가꾸려면 시간이 많이 들어서 귀찮아서 였을까?

그보다도
일제 점령하에서
독립을 꿈꾸며 일제의 점령에 항의하고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려고
그런 머리를 하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목사님의 삶이
그렇게 생각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멋있는 옷도 멋있는 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앞에서는
아무도 목을 꼳꼳하게 들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인격에 눌려
그분 앞에 가면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였습니다.

아들이 없으셨던 목사님은 은퇴 후
따님 댁에서 노후를 보내셨는데
여선교회 주관예배 때 설교를 해주시고는
택시비를 드리려는 교인들을 나무라시며
빠른 걸음으로 내빼듯 가버리시곤 하였습니다.

6.25. 이후 내가 중등부 때
이하영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에는
하늘을 보면서
마치
지금 하늘의 음성을 들으면서 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을 보는 모습 속에는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듣는 우리는 모두
마치 하늘나라에 함께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곤 하였습니다.

가난함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인격과 가르침을 위하여
가난을 즐기며 살고 계셨습니다.

이하영 목사님을 기억하는 모든 분들은
그분을 훌륭한 성직자=하나님의 사람 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목사님을
가난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을 기억하는 삼청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주님을 만나려고 기도를 할 때면
꿈에 이하영 목사님이 대신 심방을 와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끔 지방회 행사에 참석한
이하영 목사님의 외손자이신 종교교회 김정태 장로님에게서
그분의 인자한 미소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가끔
훌륭한 인격을 가지신 김정태 장로님이
왜 목회를 계속 안하시고 장로로 머물러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외조부에게서 받은 성직자의 상이 너무 엄청나서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목사님을 도웁는 사명으로 만족하신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해 봅니다.

2. 네분의 목사님

10여전 전
뜨레스디아스 참가 차 어느 기도원에 머물렀습니다.

네분의 감리교회 목사님이 함께 주무시는데
저는 나이가 많다고 하여 목사님들과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1)
경기도 농촌 지방에 계신 목사님께
교회 형편을 물었습니다.

「 5년동안 300,000원의 사례금을 받고 있다가
금년에 500,000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교회의 중류가정의 삶과 비슷하거든요.
농촌교회를 도시교회와 비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농촌교회는 농촌의 특성대로 평가해야 합니다.」

2)
충청도에 계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일을 하다가
죽음 직전에 소명을 깨닫고 헌신하였습니다.
여러교회에서 보내온 선교비를 감사하다고 중단시키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 쓰기로 하였습니다.

석달을 아내와 함께
반은 금식하고 반은 식사를 하면서 견디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지혜를 얻었습니다.
이웃교회의 목사님들이 성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3)
강원도 산간지방에 처음 목회를 나간
전도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견디기로 하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석달을 오이와 고추만 먹고 견디었습니다.
그 후 먹을 것이 생겨 지금껏
견디고 있습니다.
내 모습이 어디 굶주린 사람 같습니까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수원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부임한 이래로 3년동안
사례금을 한번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잘 먹고 살고 있습니다」

「교인은 몇명인데
도시에서 사례금을 못드리나요?」

「교인은 한 40명 되는데
이것저것 교회에 필요한 것을 지불하다 보니
내가 쓸 것이 없더군요.」
..................................................................

네분의 목사님중
한분은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시고
3분은 도시교회의 부목사로 계십니다.

나는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이런 고난을 견딜수 있게 하였나
명상해 봅니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소명을 감당한 『나실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많은 우리 감리교회의 성직자들이
이런 고난 속에 사명을 감당하고 계심을
보고 듣고 있습니다.

저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감리교회를 사랑하시고
이런 성직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예언의 말씀을 주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1. 연수원 가는 길

일영 연수원 가는 길에서 만난
어떤 목사님

언제나 미소를 띈 얼굴엔
가는 주름이 몇개 있습니다

누가 속을 썩여서일까
교회건축 때문일까

모습엔 늘 겸손함이 있고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주님을 찾아보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이야기 도중
가끔
깜짝 놀라는 듯 눈빛이 밝아지곤 합니다.

그분의 모습엔 언제나
주님을 만나보려는 간절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