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114. 도전과 비움의 철학

대부분 종교의 가르침은
무욕과 무소유를 통한 가벼움에 이르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니 불만도 없고
소유한 것이 없으니 지킬 것도 없다.
그러니 걱정할 것도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그 몸과 마음의 삶이 천국과 같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과연 무욕과 무소유가 행복할 수 있을까?

무소유는 나눌 것도 없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삶을 위하여서는
무소유 자는 소유자를 위한 일을 해주고
분깃을 얻어 쓸 수 밖에 없다.

비움의 철학은 얼핏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다가는
가족들과 함께 걸인의 신세를 면키 어렵다.

결국 모든 인간의 삶은
가족과 함께 삶을 영위하고 이웃과 나눌 것을 위하여
삶을 위한 소유를 위하여 도전할 수 밖에 없다.

모든 도전에는 경쟁자가 있고
경쟁자와 승리하기 위하서는 양보할 수 없다.

하여
삶 속에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비움과 존재의 가벼움에 이르는 철학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것을 뜻함이 아니다.

삶을 위하여 도전과 극복을 해야 하지만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손해를 보면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말함이다.

살아있는 동안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서는
끝없는 도전과 극복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내지 않고
힘이 있는 자가 더 많은 힘을 독점하려고 욕심내지 않는 것이
참된 의미의 비움과 가벼움에 이르는 철학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전과 극복,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끊임 없는 노력,
그 중에 작은 희생을 감수하는 자를 일컬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113. 목동 Gyges의 마법 반지 이야기

목동 Gyges는 마법 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끼고 있는 반지를 안으로 돌리면
자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목동 Gyges는 이 반지를 이용하여
왕궁에 들어가 왕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그리고 평생 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
이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 2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고도 붙잡히거나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면
우리가 선하게 살아가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플라톤은 이 문제를 통하여
도덕성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
우리 교회는 요즈음 감사절을 앞두고
일주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많은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왔음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통하여
나의 삶 속에서도 목동 Gyges의 마법 반지가 있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나의 믿음생활 속에
관습으로 숨겨져 있었습니다.
.....................................................................................
세상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회개의 기도로 용서함을 받고
의인으로 인정되어
다시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평생의 삶을 통하여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어워할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철면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행복 속에
목동 Gyges의 마법 반지는 과연 없었는지
하나님께 감사의 조건을 찾는 이 기간에
더 깊이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이 행복의 조건들이
회개해야할 조건들인지
감사해야 할 조건들인지 기도해보아야 하겠습니다.
...........................................................................
온전한 나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12. 쏠라피데와 파르헤지아


기독교는 캐논인 성서에 대한 쏠라 피데(오직 믿음)로
개인의 신앙과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푸코의 주체적 태도/파르헤지아는
우리 기독교의 고백과는 대립관계에 있는 말이다.

파르헤지아는 라틴어의 libertas인데
말의 자유, 솔직히 말하기,
상대방을 동요시키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하며
실존의 스승의 말이 갖는 태도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실존의 스승이란
현명하게 처신하는 법을
배우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는 賢者(현자)를 말한다.

미셸 푸고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인
『진실의 용기』에 보면
푸코는 감옥정보그룹(GIP)을 만들고 이 모임을 통하여
소외된 감옥 속에서 일어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하여
일반사회에 알려지게 하는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실의 용기이며
파르헤지아의 어원이다.

지식인인 푸코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적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발생되고 있던 바를 파악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

우리는 가끔 기독교 자체 속에서
파르헤지아를 보고 있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처럼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은 좋지만
그 결과를 특정지으려는 것은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방법은 그 답이 하나일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의 방법은 두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조직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쁜 일들은
반드시 알려지고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처리방법은 상식과 다르게 결정될 수가 있다.

모든 죄인은 벌을 받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것이 구약이고 하나님의 법이다.
비록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그 보응을 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교회의 죄인에게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회개와 용서라는  아가페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였는지 누가 알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과 죄인과의 만남 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잘못을 시정할 때에도
파르헤지아가 아닌 쏠라 피데(오직 믿음)로만 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죄을 지은 사람이 우리들 앞에서
거짓으로 회개한 척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와 우리 모두는
거짓 회개에는 용서도 물론 없고
영원한 삶도 없으며 영원한 저주 속에 산다는 것이
우리가 믿고 알고 있는 쏠라피데이다.

믿음의 대상도
회개의 대상도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대상도
오직 한분 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84)

111. 하늘나라에 가는 비용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하게 되는데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넣으면서 소리를 지른다.

입 왼쪽 에 쌀 두어개를 넣으면서
일천석이요~
또 오른 쪽에도 쌀 두어개를 넣으면서
일천석이요~
가운데 쌀 두어개를 넣으면서
일천석이요~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염을 끝낸다.

하기야
죽은 사람이 한알을 넣었는지 두알을 넣었는지
알수야 없겠지만
저승가는 길에 굶주리지 말고 잘 먹으라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재래식 한국의 장례풍습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어떤가

하나님나라에 가면 각기 바친 것만큼의 집과 재산이 있어서
각기 그것을 쓰면서 영원히 산다고 한다.
도대체 영원히 살기 위하여서 1년 생활비가 얼마가 필요할까

그곳은 죽음도 없으니
적게 바친 사람은 영원히 헐벗고 굶주리면서 살게 될 것이다.

도대체
하늘나라의 개념과 너무나 맞지가 않는 모습이다.
그것이 어찌 하늘나라이겠는가....
..........................................................................................

그렇게 바쳐진 헌금이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고
돈이 되어 쌓이는 바람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고
타락과 죄의 자료가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은
흠 없고 티 없는 죄를 짓지 않은
어린 양이라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그런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죄 없는 산 짐승을 무참이 죽여
덤테기를 씌우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뜻으로 풀지를 않고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한 카인의 후예의 지혜로 풀면
늘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무정하고 무심하며
소갈딱지가 없고 까달스러운
외고집의  변덕쟁이 노인이란 말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얄팍한 지식과 꾀로
무식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악한 인간의 모습이다.
...........................................................................

자식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모든 사람들(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아무 조건 없이 집으로 다시 돌아와
서로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면서 살기를 원하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용서하고 구원하시려는
바다보다 넓고 하늘 보다도 높은
우리 주님의 사랑

그것을
욕심 많고 얕은 꾀가 많고 죄 많은 인간이
어찌 짐작할 수 있으랴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기독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한  것이다.

아무 값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만으로

원래 살던 본향
에덴동산에서.....

110. 칭찬과 박수



아주 오래 전
일부러 명성교회 저녁예배에 참석해 보았습니다.

설교 전 찬양순서가 5개 정도 있었습니다.
성가대, 여전도회 중창단, 목회자 중창단, 현악4중주 등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한 순서가 끝날 때 마다
김삼환 목사님의 칭찬이 있었습니다.

와 ~~
내 평생 이런 아름다운 찬양은 처음 들었습니다.
정말 환상적이네요

그 말을 들은 교인들은
와~
하고 웃으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다음 목사님들의 중창이 끝나자 또

야....어쩌면 이렇게 은혜스러울수가 있습니까
이런 은혜스러운 찬양은 평생 처음 들어봅니다

교인들은 다시 박수를 치면서
와~ 하고 웃었습니다.

다른 중창이 끝나자
정말 천사들 같아요
이렇게 예쁘고 노래잘하는 중창단은 처음이에요
정말 은혜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말씀하시는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함께 웃으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순서가  끝날 때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 날 설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미 마음문을 활짝 열고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교인들은 큰 기쁨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우리는 칭찬과 박수가 부족합니다.
윗 사람은 아랫사람의 작은 성취를 크게 칭찬해주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성공을 크게 박수쳐주고
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하는 교회와
퇴보하는 교회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늘 칭찬해주는 선배나 어른이
왜 존경이 가지 않겠습니까
작은 성취에 크게 박수를 칠 것입니다.

우리는 의를 가르친다고
후배나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칭찬을 하면 교만해 져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후배는 그것을 그대로 배워서
다른 사람들의 성취에도 좀처럼 칭찬을 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배나 스승의 잘못에 대하여
큰 발견을 한듯이 크게 떠들어 댑니다.

그곳에는 이미
기독교의 사랑과 화해와 용서는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의인의 훈련을 받아
다른 사람들의 단점을 발견하고 폭로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벌거벗은 아버지 노아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숨기려고 노력한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교훈은 없습니다.
.................................................................................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희생을 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다면
무엇을 그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요

크게 성장한 교회는
대개 그런 특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성장의 비결을 연구하여 나누는 것이
그 큰 교회의 단점을 파헤쳐 정죄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09. 자아발견



왜그런지?

어떤 부분에서
스스로를 전문가인 양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정 집단에서
전문가인 내가 없었어도 공동체는 잘 운영되는 것을 보고
퍽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야
내가 전문가인 것 처럼 보인 것은
어느 누가 나를 그렇게 보이도록 세워준 것인 것을 알고
아주 엄청나게 쑥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가?

오랜 세월 교회를 다니느라고 많은 견문이 있다.
많은 견문이 있다는 것과
은혜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과를 분간치 못하고
항상 스스로 독특한 신앙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사람과 깊은 사귐을 갖고 보니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나보다 우월한 경지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신앙의 깊이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여 죄 주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는 고개를 들지못하도록
망신을 주는 것일까?

죄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막달라마리아를 감싸주던 주님의 사랑이 생각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과연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죄를 사함받고 영생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 것인가?




108. 문제


인간의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삶의 문제는 삶의 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문제는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삶의 질에 관한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어느 누구의, 어떤 경우라도
삶의 질을 만족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질이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고민은 삶이 끝나는 죽음에서 끝이나고
살아있는 동안 걱정과 근심은 계속되기 마련입니다.

기독교는 삶과 죽음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질을
영원한 삶을 위한 성공적인 준비기간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위하여 지금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은
너무 동물적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아가페라고 하며
그 사랑을 본받는 삶이
크리스쳔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온전한 아가페를 이룬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107. 성경


성경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봉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순간
나의 잘못된 삶을 회개할 수 있으며
결심과 간증으로
나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계시이고
비젼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 모든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계시의 말씀은 나를 깨우칠 수 없고
나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이미 문을 닫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간증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동행하는 천국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106. 기독교는


기독교는
삶과 죽음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행복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그 행복은 용서와 화해를 통한 사랑으로 얻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만나 사랑하고 도와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영생을 구원이라고 하고
불행한 영생을 영벌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과 사랑하며 사는 사람만이
영원한 행복,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영생을 준다고 하여도
그런 사람끼리 영생하는 사회는
이미 지옥인 것입니다.

105. 12제자


누가 복음 9장 1~6절에서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귀신을 이기도록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을 고쳐주라고 이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쳔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사람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으로서의 삶을 모두 포기하고
공적인 삶을 사시면서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스스로를 희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값을 치룬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받고 영생을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제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크리스쳔으로서의 삶은 어떤 것이 있고
제자로서의 삶은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
12제자 중에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의 생업을 가진 평범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와 사회의 지도층이 아닌
서민 중에서 선택하신 뜻은
그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서민의 삶에서 떠나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구원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귀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서민 속에서 열매를 맺었듯이
교회는 모든 관심과 활동의 중심이
그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이 모이는 교회인가
얼마나 건물이 큰 교회인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교회가 서민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크리스쳔의 삶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104. 교회


교회는 썩지 않았습니다.
썩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계신 집이고
주님이 머리가 되시며 그 집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썩었다는 말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썩었다는 말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죄인을 용서하라고 하신 가르침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썩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썩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들도 썩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의 행동 때문에
교회에 썩은 냄새가 날 뿐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
그 어느 것 하나도
교회를 썩게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교회를 썩게하는 것
그것은
시험에 빠져 죄를 짓고 사는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103. 마지막 만찬과 겟세마네


마태복음 26장에서

죽음,
그것은 삶의 최악의 상태입니다.

슬픔도 고난도 고통도 살아있어야만 느낍니다.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먹는 식사,
얼마나 목이 메었을까....

그 중 하나는 자기를 팔아먹고
자기를 부인할 것을 뻔히 알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마음의 심한 고통을 말하며
중보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잡으러 왔을 때
저항하는 제자들을 말리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결심을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무슨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과 고통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102. 가장 높은 사람


마태복음 18장에서

높은 사람의 개념은
어느 조직을 다스리기 위하여 최고의 권력자가 있고
최고의 권력자로 부터 그 권력을 분담한 권력 서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높은 사람이란
사람을 복종하게 하는 힘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즉,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힘으로 강제 복종케하는 자를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권력자는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힘으로 강제하는 폭군이 있고
마음으로 존경하여 스스로 깨달아 자발적으로 행하게 하는
성군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허락받은 피조물, 인간과 하나님의 사자가
함께 있을 뿐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과 그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세상처럼 부귀공명을 다투는 곳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이 되고, 많이 갖고, 많이 아는 것을
행복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고,
협력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가르치심에 제일 많이 성화된 사람이
존경받는 곳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원받은 자가
존경받는 곳 또한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함께 살도록 허락하신
감사가 넘치는 곳입니다.
....................................................................................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귀공명을 위하여 세상에서 변질되지 아니한
창조의 섭리 그대로 깨끗한 자는 어린아이들 입니다.

높은 사람이 무엇인지
부자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상태
어린아이.....

그런 심령이 된
그런 심령으로 돌아간
회복된
그런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어린아이 같이 성화된 심령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고 존경하고 환영하는 사람...

그는 이미 영안이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땅 위에서 살면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을 알아보고
사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사람이고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101. 말과 말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이 말씀이다.

인간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고 버리는 것이 많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변함이 없고 천지 간에서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말을 하도록 하시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로
스스로를 망치고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키지 않고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믿고 말하고 있으나
아무도 그를 의인으로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차라리
나를 죄인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말 못하는 사람만도 못하다.



이 세상에서 한 모든 말에 대하여
그 내용으로
의인과 악인을 판단하는 재료로 삼을 것이라고
마태복음 12장 36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다.

100. 야곱과 요한의 어머니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은
자식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훌륭한 공부를 하고
그에 걸맞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훌륭한 대우를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야곱과 요한의 어머니도
자식들이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그 스승곁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기를 바랐습니다.
.......................................................
그런데
야곱과 요한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 처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희생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존귀를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대신 죽으려고 오신 분 입니다.

그런데
스승의 고난과 죽음은 같이 나누려하지 않고
명예와 존경만 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님의 고난과 죽음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강도상 뒤의 십자가처럼
높은 곳에서 존경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밝히 알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 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믿는 믿음에 의한 구원이고
영광과 존귀는 예수의 제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사랑으로 오래 참으며
낮은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그것을 위하여
성도는 부르심을 받았고
제자들은 계속 양육되고 있는 것입니다.

99. 포도밭의 일꾼


마태복음 20장의 포도밭 일꾼 이야기

포도의 계절
일이 매우 많아서
주인은 일꾼을 구하여 일찍 일을 시작하게 하고 거리에 나가보니
아침 9시가 되었는데도 일을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1데나리온에 계약하고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12시에도, 3시에도, 5시에도
같은 방법으로 계약을 하고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저녁에 일이 끝나고 임금을 계산할 때
제일 늦게 온 사람들부터 임금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 온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왜 더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이것이 이른바 텃세입니다.
오래 다닌 사람
먼저 온 사람
주인과 잘 아는 사람

그들은 각기
특권의식을 갖고
주인으로부터 그렇게 대우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포도밭 주인에게는 모두가 다
포도원 일꾼일 뿐이고
그들을 차별대우 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
교회란
1데나리온에 일당 계약을 한 일꾼들 처럼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신앙을 고백한
영생을 약속받은 성도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온 성도나, 오래 다닌 성도를
특별 대우할 마음이나 계획이 전혀 없으십니다.

다만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가름침대로 살아가는가
그것이 중요한 관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관심이 없는
상하의 관계를 만들어 놓고
높은 척 해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자신
하나님의 섭리대상 일 뿐이니까요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낮고 겸손한 마음과 자세가 있을 뿐입니다

98. 가난한 사람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여덟가지의 복 가운데
첫번째 것이 가난함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부자가 아닌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을 주신다는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교훈이다.

가난함
그 자체가 이미 고난을 의미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어떤 목사님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가난함은 그 사람의 모자란 점과
  부족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나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에서 말하는 가난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는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복이 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강하게 해주시려고
가까이 닥아오신다는 것이다.

나에게 닥아오시는 주 하나님
그분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너무 교만하게
자신만만하게 살아오지는 아니하였는가

반성하고
회개하고 있다.

97. 그리스도인의 죽음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
모든 신앙인들도 죽는다.

목사님도 장로님도
권사님도 집사님도 성도들도
모두 죽는다.

신앙인들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죽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을 갖고 죽는다.

나이가 늙어 죽음이 가까이 오면
모든 신앙인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면서도
모두 두려워한다.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회고해보면
의인으로 인정받기에는
너무 죄된 삶을 살아왔기에
두려움 속에 마지막을 맞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죽음의 다음 순간이 바로
부활의 날이요 천국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
모든 사람의 죽음과 방법은 똑같더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십자가의 공로를
염치없이 믿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소망중에 바라보며
주님의 소천에 순종하는 것이다.

96. 갈등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늘과 땅을 향한 갈등이 있다.

나사로와 같은 삶과
부자와 같은 삶이다.

천하게 살다가 천국에 간 나사로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지옥에 간 부자

누가 성공한 인간인가?

나사로는 인생을 성공하여 천국에 갔지만
나사로와 고생하며 같이 살던 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부자인 가장을 만나
부귀영화를 누리던 부자의 가족들은
다 지옥에 갔을까?

부자는 자기의 죄값으로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자기의 믿음으로 천국에 갔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많은 좌절감 속에 살던 나사로의 가족들은
삶 속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인내하며
끝마칠수 있었을까
잘못된 가족들은 없었을까

그것은 나사로의 책임이 아닐까

부자는 비록 죄값으로 지옥에 갔지만
훌륭히 성장한 가족들이 마음에 갈등이 없이
좋은 일을 많이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나사로의 실패한 가족들과
부자의 성공한 가족들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갈등은
모든 남자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갈등이다.

가족을 평안히 살게한 지옥에 간 부자와
가족을 고생시킨 천국에 간 나사로중에서
누가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인가

95. 사도행전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시고
생각과 행동의 주체는 성령이신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초대 기독교의 중심활동은
성령께서 행하시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기독교도 성령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게 하여야한다.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는 너무 인간적이다.
기독교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회가 너무 인간적이다.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고
성령이 주관하시지 않는 곳은
이미
교회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성령께서 어떻게 명령하셨는가?
대신
어느 목사님과 어느 장로님의 뜻인까?

이것이 우리나라 교회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야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정당한 답을 해야한다.

그것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뜻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한다.

뜨거움이 있고
감격과 감사와 예배가 있는 곳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만날 수 있는 곳

그곳이
사도행전의 교회
참다운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94. 성도의 마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자기를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바울도 목회서신에서
자기를 괴롭혔던 자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요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는
편을 가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나와 친한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등등....

성도의 눈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과 구원을 받을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과 받을 사람 만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의 가치는
모든 사람들이 똑 같습니다.
즉,
구원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 뿐 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아직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 저주의 대상이 남아 있다면
아직 온전한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낮고 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과 내가 동일한 가치로 생각되어야
비로소 성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93. 기도원에서 만났던 K씨

기도원에서 만났던 K씨

30여 년 전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대한 수도원에서 특별한 이를 만났다.

제대한지 얼마 안된 체격이 당당한 젊은이였다.
낮에는 힘든 일을 하며 기도원 예배당 건축일을 도왔고 밤이면 기도하면서 경건을 훈련하고 있었다.
아무 걱정이 없어 보이는 그가 밤이면 눈물을 흘리며 심각하게 기도하는 것을 오래 동안 보면서 그 고민의 내용을 물었다

그는 마음 속에 전쟁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비록 전투중이었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자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내가 용서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심각하게 되물었다.
권사님!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내 이 큰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까요?

정말입니다.
나는 힘있게 말해 주었다
그는 희안한 표정을 하면서 기도하던 어떤 목사님에게 찾아가 똑같이 물었다.

목사님!
저 권사님이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까요?
이 세상에서의 징벌은 아무렇게도 생각치 않습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처리해 주실까입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그 외 몇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 같은 대답을 얻었다.
얼마 후 기도원을 내려간 그는 편지를 하였다.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보람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를 살던지 이제는 감사함으로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는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늘 생각나는 사람이다.

92. 기도원에서 만난 비구니


비구니 출신의 한 분이 예수를 믿겠다고 대한수도원을 찾았다.
그녀는 방에서 자지를 않고 예배당의 종탑이 있는 곳 2층 마루방에서 기거하며
새벽기도와 저녁예배, 낮에는 다른 사람들 처럼 근로봉사를 하며 수도를하였다.

시간시간 성경을 열심히 읽고 틈틈이 기도를하였다.
그녀는 명문 Y대 출신으로 비구니가 되었으나
종교를 바꾸기 위하여 그곳을 찾았는데
왜 도시의 교회를 먼저 찾지 않고 그곳을 먼저 찾았는지 알수가 없었다.

4월 5월의 한탄강변은 아직 추웠다.
밤에는 군불을 때지 않으면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녀는 두달을 그곳에서 기거하면서 우리가 춥지 않느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하면서 그곳에 머물렀다.

한번은 이질이 생겼다고 했다.
두달을 넘게 머물던 그는

예수 믿기가 참 어렵군요
도로 절로 가야겠어요

그 후 나는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한편
그 때 왜 좀 더 적극적으로 그를 안내하고 가르쳐 주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있다.

전도라는 글을 이야기하거나 의논할 때마다
예수믿기를 포기하고 하산하겠다는 그 때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곤한다.

91. 전쟁은 없어야 한다


한 사람이 죽어도 그 원인을 규명하며
살해 당했는지 자연사인지를 규명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사람을 추격 체포하여 그를 법으로 심판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는 빈부귀천이나 큰 나라 작은 나라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된다.
그런데
전쟁에서는 그런 모든 법과 질서와 가치가 무시된다.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죽어가고 있다.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전쟁터에서는 서로 죽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너무 마귀적이다.
예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는데

인간은 반대로 자기의 의를 위하여
많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전쟁은 없어야한다.

90.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고 있다.
아니
하나님이 안계시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종교지도자들 조차 평소의 언행을 보면
그건 살아계신 하나님앞에서 행하는 언동이 아니다.

언행이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신이 되어 성경을 자기 편하게 해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선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다가 맥없이 죽어가고
악한 사람들이 교회 안과 밖에서 떵떵거리고 살기 때문에
신이 안계시다고 믿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착각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살피며 보호하고 계시다.
왤까?

마지막 날
양과 염소를 분간할 때까지
오래 참고 또 참고 기다리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89. 성령 하나님 그리고 악령에 대하여


30여년 전 기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기도원의 영적지도자 한 분이 어느 환자를 진단(영적)하면서
양신역사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드니 그의 몸(영과 육)속에서
성신과 악신이 같이 있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정신이상의 상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이 문제를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신과 악신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을까?
성신 즉 성령은 하나님이고 악신 즉 악령은 타락한 천사인 피조물인데
어떻게 동격으로 표현하고 있을까?
그 기도원은 많은 영적인 기적으로 유명한 곳이었으나
나는 이 기본적인 문제에 의문을 갖고 더 이상 그곳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어떤 기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내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격으로 표현하는 이 모임에
더이상 머물지 않고 관계를 단절하였습니다

그 후 나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멘'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입에서 나오는 '아멘'이 바로 내 믿음의 고백이며
영생을 향한 내 고백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devil 공포증으로 고생하는 친척을 보고 과감히 증언한 일이 생각납니다
devil은 가상의 단어이지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일시적인 모습일 뿐
참된 존재인 실존하는 분은 하나님 한분 뿐 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지금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며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나는 우리 주위에 신비주의란 이름으로 이런 악령들을 실존화 내지는 하나님과의 동격으로 다루는 언어들을 비판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유일하신 참된 존재이시며
피조물인 이 세상의 어떤 유한한 존재 내지는 꾸며낸 상상의 것 들과 비교할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88. 종교의 지도자


모든 사람들은 지도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삶을 그릇치게 된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부모의 지도를 받으며
생존에 필요한 기초지식을 배우게 된다.

자라면서 또래의 친구들과 만나면서 사귐을 배우고
스승에게서 미래를 향하여 도전할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모두들 인생을 성공하기 위하여
좋은 스승이 있는 좋은 학교를 가려고 경쟁을 하게된다.

종교는 삶의 궁극을 결정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에서도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누가 종교의 지도자인가
성직자들인가
년륜이 쌓인 신자들인가

스스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 사람을 본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87. 다원주의 시대의 신앙


참된 신이신 한 분의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를 희생하며
서로를 사랑하고 살도록 가르치셨다.

그러나
힘이 있고 꾀가 많은 한 사람이
모두를 억압하고 지배하며
하나님 대신 군림하였다.

이제 우리는 눈을 떠
이 세상에는
나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나와 똑같은 가치를 갖인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인정하여야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86. 십자가와 제자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바로 나의 죄와 구원을 위해서 희생당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십자가 앞에서 복을 구하고 있다.
영생을 주신다는 분에게
생명대신 돈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지금도
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못하고 피를 흘리고 계신 주님은
내가 회개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신다.

교회에는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제자들만이 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하신 주님은
온 세상에 이 소식을 전해달라고 유언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적 사랑을 가르치셨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라면서 돈을 구하고 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오늘도 주님은 피를 흘리신다.

85. 부자와 거지 나사로


한국의 기독교는 부자 기독교이고
북한의 기독교는 거지나사로와 같은 기독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북한의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나타난 형식적인 거짓 기독교가 아니라
지하에서 기도하고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는 실질적인 기독교를 말한다.

우리는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도와 주고 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북한에 있는 기독교도들은 남한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한다.

남한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꼭 천국에 같이 가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들의 먹을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동안
그들은 우리들의 영생을 걱정하고 있다고한다.
즉 , 그들은 우리들을 구원받지 못할 타락한 가짜 기독교인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은 부자들이 모이는 곳인가?
천국은 고위권력자 출신들만 가는 곳인가?
천국은 목사와 장로, 교황과 신부들만 가는 곳인가?
천국은 세계적인 강대국 기독교인들만 가는 곳인가?

흑인들의 영가가 다시 생각난다.

오 주여
저 백인 성자들이 천국문에 들어 갈 때에
나도 함께 가게 해주세요

나사로 교인들의 노래가 들린다

오 주여
저 성공한 부자장자들이 천국갈 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84. 건물이 큰 교회와 믿음이 큰 교회


작은 교회는 늘 큰 교회를 부러워한다.

눈꼽딱찌만한 목사님의 사례비를 집행 못하고 늘 죄스러워하는 작은 교회의 교인들은
큰 교회가 되어 차를 타고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러 다니시는 목사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한다.

수 십년이 지나는 동안 교회는 성장하고 수 백명의 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보며
큰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근사한 차를 타고 다니시는 목사님을 보며
감사해한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교회에서는 지하도에 돗자리를 깔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고
가족같은 서로를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해 주었었다.

그런데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기시 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외식하는 자로 따돌림 받는다.

어떤 것이 큰 교회인가?
건물이 크면 큰 교회인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큰 교회인가?
헌금 액수가 많으며 큰 교회인가?

기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겸손이 넘치는 교회......
그것이 큰 교회가 아닌가?

누가 하나님의 의로운 손을 움직이게 하는가?

83. 영적인 눈


무릇
모든 신앙인들에게는 두가지의 눈이 있다.
하나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영적인 눈이다.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목사와 만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대심방 기간이 아니면 가까이에서 만날 수가 없고
예배드릴 때 예배의 집례자와 설교자로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자로서 목사와 자주 만나다 보면
예배 때와는 또 다른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는 평신도와는 다른 아주 엄격한 신앙의 잣대로
그 모습을 평가한다.
그리고는 시험에 든다.

여기에서
나는 신앙인의 눈을 새롭게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만나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목사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나?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계시는 무엇인가?
를 생각하면 된다.
신앙생활을 목적으로 서로 만나서
개인적인 일로 신앙의 본질인 영적인 것을 훼손시킬 수는 없다.

영적인 눈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찾는 안목이다.


82. 진실한 크리스천


교회의 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만나면 섬뜩할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곳은 천국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속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격체........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예수의 인격체라고 말 할 수 없다.
돈과 명예에 눈이 어두어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런 인격의 상태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평가하고 정죄한다.
설득력이 없는 혼자만의 소리들....

만나면 반가운 사람....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은 사람...
말하면 할수록 은혜가 되는 사람...
가만히 같이 있기만 하여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예수의 인격체를 갖인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해가 해로 보이고
달이 달로 보이고
별이 별로 보이는 눈 ......

그런 진실한 눈을 갖인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81. 가난한 크리스천


믿음의 궁극적 관심은 부귀영화인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성공한 신앙인의 모습인가?
큰 교회에서 웅장한 성가대의 음악을 들으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참 멋이있다.
그런데 어쩐지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수의 아들로 성장한 후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 보다는
농촌에서
바닷가에서
비록
겨우 호구지책을 해결하고
교회의 모습이나 강도상의모습이나
어느 것 하나 멋있어 보이는 것이 없어도
십여명  옹기종기 모인 시골 노인들이 어색한 곡조의 노래를 불러도
그곳에서 성도의 거룩함을 느끼게 됨은 왜일까?

눈물로 지새우는 가난한 목회자
하루의 끼니와 그날의 건강을 소원하는
가난한 크리스천에게서
믿음의 진실을 보게됨은
나의 편견 때문일까?

80. 위대한 예수


김진홍  목사님의 [두레성서공부]를 하러 다닐 때이다
[나는 영생구원이 없어도 예수의 제자가 되어 목사노릇을 할 것이다
그 분의 가르침과 생애가 얼마나 훌륭한가?]
김진홍 목사님의 이런 강의는 내게 퍽 충격적이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분은 가정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건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역활도 충실히 지켰고
인생의 최고 목표를 자신의 공명과 가정의 부귀를 추구하는데 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기꺼이 희생시켰다.

신의 사명이 아니더라도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하물며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으로서
피조물인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신의 인격이다
피조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신은 기독교 이외에서는 볼 수 없다

그 희생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고 전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김진홍 목사님은 계명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강의까지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신 분이다
인간의 참된 의미 -
그 분은 위대한 예수에게서 그 해답을 찾았다고한다

79. 신앙의 문제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삶 속에 신앙 아닌 신앙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려 하고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으면 죄인이 되고
  죄인이 죽지 않고 살려면 구세주를 믿어야하고  우리의 육신은 다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
을 믿는 것이다.

즉,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영생구원을 얻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지금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닥아올 천국  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추구를 너무 강조하고 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  행하신 기사와 이적은 복음의 확실성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지
이 땅에서의 부귀공명을 위함은 아니었다.

결과는 어떤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부귀공명을 가르치고
내 몸을 희생하여 남의 생명을 구원하는 아가페는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생구원을 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재래 한국 무속종교와 혼돈의 상태이다.

78. 종교간의 갈등


2002년 5월 20일
오늘 이 시간 현재
세계 각처의 대부분의 전쟁과 분쟁과 갈등은 종교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중동에서의 유태교와 이스람교의 갈등
인도에서의 힌두교와 이스람교의 갈등
영국의 기독교 구교와 개신교의 갈등
우리나라의 불교와 기독교의 갈등 ..................

갈등의 이유인즉
서로 배타적이다
모든 종교는 스스로의 종교 이외의 종교를 인정치 않고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표시하는 한자의 뜻은 가장 크고 최고의 가르침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조물주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사랑과 자비와 희생을 인간 삶의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왜 종교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끔직한 전쟁을 치르며 살상을 하는 것인가?

모든 종교는
스스로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종교를 용납치 못하게 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존중하되 자기와 다른 종교인은 사정없이 살생하도록 정경에서 가르치고 있다.
과연 이 세상의 신이 그렇게 명령 했을까?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신과
사랑과 자비와 희생이 없는 신과
헌물 받기를 좋아하는 신이
참된 신일까?

그런 이야기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배타적인 것은 겸손과 사랑이 없는 것이고
헌물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으로 호의 호식과 호강을 하려는 인간의 생각과 너무나 흡사하다.

모든 종교의 정경에서 인간의 생각을 빼버릴 수는 없을까?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신은 과연 무엇을 바랄까?
우리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자식이 잘 되고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있듯이
조물주도
우리들의 즐겁고 기쁜 평화로운 삶을 원하시지 않을까?
스스로 폭탄으로 무장하고 이교도의 공통체 안에서 많은 이교도와 함께 폭사하는 일들......
과연
신이 그렇게 시킨 것일까?

인간끼리는 이교도가 있을지 모르지만
조물주에게는 똑같은 피조물일 따름이다.
인간들이
어떻게 조물주를 배우고
조물주의 규칙을 받든지간에
조물주는 스스로 지은 인간과 세상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서할 줄 모르고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고
편협한 협의의 의미의 신만이 참 신이라면
우리는 정말 끔직한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교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공평치 못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바꾸지 않는 한 타 종교를 용납하고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조물주의 참 된 바람이 아닐런지........

우리에게 자식을 낳아 기르도록하심은
조물주의 뜻을 깨우치려는 더 큰 은혜인지도 모른다.
하여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하도록.....................



77. 이단의 문제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했던 중세 유럽 -
세계사는 그 때를  암흑시대라고 쓰고 있다.

진리와 정의가 없고 교리가 바로 진리이고 정의였다.
'지구는 둥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이 간단한 진리가 교리에 어긋난다며 처형하였다.

교리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생활에서 지키고 살기 위한 해석과 적용의 원칙아닌가?
아무리 권위있고 성스러운 사람들이 심사숙고하여 만든 교리와 규범이라고 하더라도

그 것이 어찌
천하보다도 귀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지키려하는
인간의 생명에 비할 수 있으랴?

설혹
그 것이 진리였다고 하더라도 교리에 어긋난다고 사람을 죽여야 했을까?
그 진리가 교리에 어긋난다고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게한 사제들은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사랑과 희생과 자비의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진노하는 하나님으로
극히 제한된 사람만을 편애하는 분으로 만든 사람들은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죄인가?

스스로
하늘나라의 비자를 발급하는 영사라도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착취하고

하나님이 싫어 멀리 떠나도록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잘 못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하나......
언젠가 우리 모두 요단강을 건넌 후
그런 무서운 사제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낙원 -
에덴동산-
천국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