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137. 위대한 수수께끼


고난 중에서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고통 중에서 행복을 설명하시는 분

굶주림 속에서 하늘나라를 증거하고
질병 속에서도 영생을 확신하시는 분

높은 곳을 원하는 자에게
무릎꿇어 디딤돌이 되어주고
깊은 곳을 원하는 자에게
곡괭이가 되어주시는 분

자전거를 타고와서
자동차을 타고 온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시고
좁은 골방에서 자고 나와
더 큰 아파트 당첨되게 축복해주시는 분

하도 많이 맞은 왼뺨 대신 오른 뺨을 돌려대려니
다치고 아픈 목때문에 얼굴을 돌리지 못하시는 분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 벗어줄
속옷 살 돈이 원래 없는 분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축원해 주시는 분

왜?
왜?
왜?

그분은 과연 누구였을까?
누구였을까?

136. 明德有新과 道


강원대학교 대학원장을 끝으로 은퇴한
친구 이희경 교수의 오피스텔에 들렸습니다.

10여평되는 방안 벽에는 책장이 꽉 들어차있고
그 안에는 많은 책들이 차고 넘쳐
책상과 의자 주변에까지 쌓여있었습니다.

커피를 나누며 한 참 이야기를 하다가
봉투에서  서예가 竹峰 黃晟現 님의 글을 두장 꺼내놓더니
한장을 택하여 갖으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서예가의 글을 값을 따지지 않고
내게 선듯 주는 것은
그가 나를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明德有新 이라고 쓰여있고
다른 하나는
道라고 쓰여있었습니다.

明德有新 :
맑고 깨끗한 덕이 있는 사람에게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
는 뜻입니다.

현재 가정이고 사회고 교회를 막론하고
지도자는 있으나
정말 맑고 깨끗한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미래를 위하여 새롭게 발전하려고 하니
지루하게 제자리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明德有新 대신 道를 택하였습니다.
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참고 견디며 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아서 입니다.

그러다 보면
明德有新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明德有新의 장소는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하늘나라라고 생각해봅니다.

道를 택한 나에게
친구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明德有新은 내가 노력하는 것이지만
道는 정말 어려운 것인데....

이 세상에서
참되고 바른 길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135. 왕과 신하


어느 모임이든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모인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게 마련이다.

종교인들의 모임에는 선과 악이 주제가 되고
법률가들의 모임에는 의와 불의가 주제가 되고
예술가들의 모임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주제가 된다.

육체의 힘이 있는 사람들은 대결하는 이야기
부자들의 모임에는 재물을 모으는 비상한 재주에 관한 것 등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주위에는
아무나 있어서는 않된다.

종교인은 아니더라도
의와 불의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고
삶의 철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이웃의 평안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신하들과 매일의 삶을 사는 동안
왕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게 될것이고
그런 결정으로 백성을 행복하게 할수 있는 것이다.

왕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고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 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134.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큰 행사를 할때에 사용하던 곳이다.

그 앞 돌로 된 뜰에는
동쪽과 서쪽에 품계석品階石이 있는데
동쪽 반열에는 문관이, 서쪽반열에는 무관이 도열해 섰었다.
이른바 양반이라는 말이 이곳 품계석에서 나온 말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란갔던 선조가
왕족이 살던 이곳을 임시 왕의 거처로 사용하다가
왕궁이 되었다고 한다.

부귀영화
그 모든 것이 있던 곳이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귀하게도 하고 천하게도 하며
권력을 주기도하고 빼앗기도 하던
무한 권력이 있던 곳이다.

오늘도 그 무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향한 사람들은
옛날과 대동소이하다.
모양과 스타일만 다를뿐..

돌로된 품계석은 말없이 서있다.
그는 마음이 없는 돌이다.
옛날에 그 앞에 서있던 사람들도
돌과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없는 돌처럼
그 위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되었을 터이니까..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우리는 그것을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라고 가르치고 배웠다.
과연 무엇이 나라를 사랑하고 위하는 충성인가

품계석의 돌이 마음이 있다면
말해 주련만...

133. The Kingdom of Heaven


영화의 제목이 나를 이끌었다.
하늘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

어떤 곳으로 표현하였을까?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십자군과 이스람국가들과의 쟁투를 그린영화이다.

유럽에서 온 십자군과 현지 중동 이스람국들과의
끔찍한 전쟁을 그리고 있다.

내용은
어느 영주의 피를 갖고 태어난 한 대장장이가
아버지를 따라가 영주의 대를 잇고 전쟁을 한다.

성을 공격하던 이스람국은 많은 군사들이 있지만
사상자를 많이 내고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결사항전을 하던 십자군 장군은
군인들과 성안의 모든 백성을 안전히 피신케하여준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성공시키고 성을 내어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믿음과 마음속에 있다고 믿는다.
어떤 명목으로도 고귀한 인간의 목숨과 바꿀 수는 없다고 믿고
부하들과 성안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고는
성을 포기한다.

이스람 왕은 성을 정복했다는 명분을 얻었고
십자군 수비장군은 백성들의 생명을 보장받는 실리를 얻는다.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

협상을 성공시킨 이스람왕은
성지 예루살렘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기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즉 국가경영을 위하여서는  별 쓸모 없는 곳이지만
백성을 뭉치게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꼭 필요하기도 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어떤 곳인가?
중동은 지금도 전쟁중이다.

영국의 아서왕이
십자군으로 성지회복을 위하여 대장간을 지나면서
옛 장군인 대장장이에게 함께할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자기는 대장장이라고 하면서 동행을  거부한다.

아름다운 인생

그는 영주도 장군도 포기하고
왕의 동생이었던 아내와
대장장이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32.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믿음


철학자 Wittgenstein은 『진리함수적 논리』를 설명하면서
『이상적인 언어는 일체의 애매성과 다의성이 배제되고
한 언어적 표현의 문법적 형식이 그것의 논리적 구조와
일치하는 언어체계이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분석철학』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신학적 명제와 윤리적 명제를 부정함으로써
Wittgenstein에 있어서
철학과 종교는 공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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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이 대 명제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증명하지 못하므로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기독교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믿음의 철학적 접근 노력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 같은 이론도
다른 철학자에 의하여 그 논리가 공격 당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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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철학이나 과학 등 모든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경험이나 지식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에
스스로 표현하시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고 말하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철학적으로
세상의 학문으로 설명하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체험적으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분이다.

그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