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76. 한재현 선생님


2005.11.6.
1953년에서 1957년 사이에 삼청교회 초대성가대 지휘자였던
한재현 선생님이 원로목사님이 되어 돌아왔다.

한재현 선생님은 감신대를 중퇴하고 있다가
최준호 목사님 시절 중간 쯔음에 교회성가대 지휘자로 오신 분이다.
그 이전에는 가끔 설교 전 특별찬송이 있기는 하였지만
성가대라는 것이 생긴 것은 한재현 선생님이 지휘자로 오면서 부터였다.

중키에 꼽슬머리인 미남형의 한재현 선생님은
옥인동의 전통 한옥에 살았는데 부모님과 위로 형님이 한분 계셨는데
감신대를 왜 중퇴하였는지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또 스스로 말한 적도 없다.

우리보다 10년 년상이니까 금년 76세이시다.
지금이나 그 때나 목회가 쉬울리가 없다.
신앙적인 자기완성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소명이 확실하여야하며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가 있어야한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어려운 목회환경이었다.
목회지는 구할 수 있으나
보수가 거의 없는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목회는 곧 가난한 삶이라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라
그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재현 선생님은 음악목사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음악목사 제도가 있었다면 감신대를 마치고
음악목사가 되었을 것이다.

눈은 늘 밝고 파란 색을 띄고 있었으며
미소를 띈 얼굴은 늘 불그레한 빛이 있었다.
정열적인 모습의 한재현 선생님은
마치 영화배우와 같은 인기가 있었고 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 때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를 합하여 『삐율라회』라는 이름으로
통합 운영된 적이 있었다.
『삐율라회』총회를 할 때면 약 70여명의 회원들이 앉아서 회의를 하였다.

우리는
안병훈(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재형(용의눈물 PD), 송한규(아나운서)등과 함께 중고등부였고
한재현 선생님은
홍성배 선생님(원로목사), 서성태 선생님(원로목사), 김명환 선생님(김동성 권사 삼촌)등과 함께 청년부였다.

『삐율라회』에서는 가끔 신앙토론회를 하였다.
토론회는 주로 쳥년부에서 리드를 하였는데
조금도 양보를 하지않고 열띤 토론들을 하였다.
한재현 선생님은 그런 토론회가 있을 때는
토론회의 주멤버였다.

서성태 선샌님은 연대 철학과 였고 김명환 선생님은 연대정외과 였으며
안병훈의 누님 안병숙은 이대 정외과 등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토론은 아주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 시간씩 길게 진행되던 토론회는 아무도 지루하게 생각하지않고
흥미있게 들으며 참가를 하였었다.

한재현 선생님은 교회를 떠난지 얼마 후
고등학교를 갖졸업한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는 배화여고 정문 근처에서
부부가 작은 문방구를 운영하였다.
우리가 신혼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동전을 헤아리며 하루 장사한 것을
결산하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 삶의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세검정으로 가족 나드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재현 선생님은 성경속에 있는 유토피아를
현재의 삶속에서 찾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년 소식이 없었다.
....................................................................................
한재현 선생님은 오관석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서울중앙침례교회의
부목으로 시무하시다가 은퇴하시고 지금은 원로목사가 되시었다.

같이 예배를 드린 한재현 원로목사님은 축도를 해주시었다.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기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실 지어다....

예배가 끝난 후 장로교 보수교단 출신의 어떤 교인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어떻게 하나님에게 [~지어다] 명령어를 사용 할 수 있읍니까

이 축도 [~지어다] 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예언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하는 것이지
인간의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다는 의견과
오래동안 장로교 교파간의 싸움이 있어 왔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독특한 자기의 길을 가던
꼽술머리 미남의 한재현 선생님...
지금은 다시 고집스런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자기 소신껏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75. 채수인 장로님

채수인 장로님

교회가 낡은 판자집에 생철지붕이었을 때에는
동네사람들도 잘 오지 않았었다.

낡은 마루바닥에 헌 방석 밖에 없었으니
손님이 와도 어디 앉기가 불편하였다.

그런데 벽돌로 지은 교회건물이 생기고
의자를 놓게 되자 많은 교인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 중 눈에 띄는 분이 몇분 계셨는데
대법원에 다니시던 채수인 장로님이시다.

하도 가난한 교회인지라 힘이 있는 교인이 별로 없어서
힘이 있는 특히 남자 교인이 오면 모두에게 힘이 되고
일꾼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최민자 장로님이 살던 집 근처에 살던 채장로님은
유학자이셨던 아버님의 큰 가르침 속에 살아오셨기 때문인지
언행에 늘 절제가 있었고
교회의 일을 할 때에는
마치 잘 모르는 사람처럼 늘 겸손하시었다.

한번은 당회때에 권사를 추천해야 하는데
대상은 여러분인데 자리가 모자랐다.
그러자 부인이신 한남순 속장님을 빼고 다른 분을 먼저
추천하도록 목사님에게 강권하시었다.
그 바람에 한남순 권사님은 다른 분들보다
조금 늦게 되시었다.

채수인 장로님이 장로로 취임하시고 얼마 안있어
이사하신 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전소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채수인 장로님과 온 가족들은
예전 처럼 여전히 웃으면서 교회에 나와
주일예배를 드리었다.

장로가 되자마자 집이 불에 타버렸으니 시험에 들법도 하건만
장로님과 장로님 가족들 모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랬다고 하면서
웃으면서 지내시었다.

청년들은 채장로님을 만나면 늘 어려워 하였다.
전산초 장로님처럼 말이 별로 없으시지만
그분의 반듯한 신앙생활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는 것 같아
채장로님 앞에 가면 몸가짐을 조심하곤 하였다.

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남기신 말씀 중에
삶을 통하여 아무 한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일 4년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직장생활 때문에 마음껏 하지못한 하나님 일을
열심을 다하여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었다.

평생을 살면서
채장로님의 마지막 남기신 그 말씀이
나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를 채찍질 하는 말씀이 되어있다.

74. 박웅천 목사님

박웅천 목사님

90 여년의 삼청교회 역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분이 박웅천 목사님이시다.

집없는 은퇴 목사님의 숙소인 주안 감리교 원로원의 총무를 지내신
박창국 목사님의 장남이시다.
아버님이 만주와 평양 등지에서 목회하실 때 유소년기를 보내신 박웅천 목사님은
철저한 독립지사의 아들로 교육되었으며
실수로 집에서 모르는 결에 일본어를 사용했다가는
아버지에게 반 죽도록 매를 맞았다고 한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신 재학중 서울 수표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전도사로 목회실습을 하셨고
군목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였다.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때는 연대장이
"목사님!
 정말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하들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할터이니
 목사님은 전투에 이기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
초 저녁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면서 계속되다가
새벽녘에 들리는
"만세~~   만세~~"
소리를 듣고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유명한 김형욱 정보부장은 당시 같은 연대의 작전과장이었다고 한다.

주월사령부 군종참모로 있을 때 권총을 차고 다니는 군목들에게
총을 끌르라고 지시하면서 목사는 군복을 입었어도 성직자 이므로
아무리 위험에 처하여도 총을 쏘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첬다고 한다.

법과 대학을 나오고 감신대를 나온 박웅천 목사님은
항상 원칙이 뚜렸하였다.
지방회나 년회를 할 때에는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는 위원회의 책임을 맡곤하였다.
한참 왈가왈부 하다가도
박웅천 목사님이 교회법의 유권적 해석을 하고 나면
더 이상 논란들이 멈추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박웅천 목사님은 분당이 있고 편싸움이 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셨다.
감리교단이 두번째 다시 갈라져 싸울 때
삼청교회는 무소속으로 어느 편에도 가담치 않았다.
그리고 지방회에도 년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교단이 통합될 때까지 기다렸다.

감리교 본부에서 일하시는 어떤 목사님은
박목사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셨다.

"박웅천 목사님은 감리교회에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분의 이력서는 석 줄 밖에 없어요.
  1.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2. 육군군목 제대
  3. 삼청감리교회 목사"

"박웅천 목사님은 모든 목회의 표본이십니다"

서울 문래동교회
이기덕 원로목사님은 이렇게 말해 주셨다.

"그분은 감리교회의 거물입니다.
 교단의 직책을 맡은 일이 없고
 부흥회를 다닌 일도 없고
 책을 써 낸 적도 없지만
 모든 후배 목사들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수유리에 있는 박웅천 목사님을 찾아 뵈었을 때
근황을 말씀해 주셨다.

"요즘은 평신도 훈련을 하고 있어.
 담임목사가 이취임을 할 때면
 원로목사라고 인사를 오는데
 당신은 내 담임목사이고 나는 그 교회 교인이니
 식사는 내가 대접해야한다고 하며
 식사값을 내가 내곤 했지."

"요즘 평안하세요?"

"처음에는 좀 이상하더라구.
 오는 전화도 없고 전화 할데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고.
 온 갖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니까 살것 같아...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전혀 새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야."

"일주일에 한번씩 성경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안할래~
 아 나도 이제는 마누라하고 여생을 보내야지
 또 그런 스트레스르를 다시 왜 받아.
 그냥 쉬게 내버려 두라구...."

부목사는 고사하고 전도사나 사무원 한 사람도 없이 30년을 혼자 견디신
박웅천 목사님의 헌신적인 목회는
삼청교회를 오늘의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 봉헌되도록 하였다.

73. 심재현 Story

심재현 Story
삼청교회의 옛날 이야기

1960년 군에서 제대할 즈음
교회에 멋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육군 하사 였는데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근무하면서 성균관대학 야간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진천 출신으로 정덕용 장로를 따라서 나오기 시작했다.
심재현은 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따라서 친구인 임수웅, 조명래, 안계갑 등이 나왔고
한신대에 다니던 정권모도 합세하여 삼청교회 청년부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
후에 목사가 된 코메디언 곽규석 씨의 동생도 따라 나왔고
임수웅을 따라 윤정순, 이성녀, 나근용의 트리오(파인트리)도 나왔으며
본교회 출신 청년들과 함께 약 30여명의 일군들이 교회학교, 성가대, 청년부 등에서 봉사하였다.

나는 심재현을 따라 다니며 여러 이름있는 문인들을 만날수 있었는데
KBS 인기 방송작가 윤혁민 씨, 신태양사 편집장 등과 명동과 시청 앞 다방에서 만나며
삶과 이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태권도, 배구, 음악, 문학 등에 발군의 소질이 있던 그는 나중에 홍익대학교로 옮겨
김은우 교수의 부인 김정숙 교수 밑에서 조각을 공부했는데
졸업 후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도미하여 20여년 살다가
수년 전 귀국하여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국적을 회복하였다.
미국 LA에서 SIMONSON(LACA)화랑을 경영하느라고 본업인 조각을  못하다가
귀국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평생 쌓은 인생경험, 믿음생활, 문학, 철학, 음악 등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작품으로 분출되기 시작하여 근래 보기드믈게 그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작으로는
광주 상무대의 5.18 민주항쟁 기념관, 대구 섬유공원 탑, 시청 앞 신동아 빌딩 조형물,
영등포 롯데백화점 앞 스카이보드 타는 아이 조형물,
목동 기독교 방속국 앞 기념탑(발강, 노랑, 파랑 색) 등 여러 작품들이 있다.
그의 조각과 친구 9 명중 7명이 미술대학장을 지냈으며
대학장을 지내지 않은 조각가 조성묵은 세계적인 조각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는 현재 명성교회의 장로로 있으며 경희대 미대에서 강의도 하고 바쁜 작품활동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
늘 그의 곁에는
손피득 목사님의 셋째 따님인 음대 출신 손미자 권사의 웃음 띤 내조가 큰 역활을 했음은 물론이다.
[아내의 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있다면  교수로 추천하고 싶은 분이다.

72. 임병학 장로님

임병학 장로님
삼청교회의 옛날 이야기

이재은 목사님이 부임하시고 교회땅을 화재때문에 점령당했던 사람으로부터 되찾고 보니
할 일이 태산같았다.
교회 땅은 다시 찾았으나 건물은 다 타서 없어지고
사찰집사가 살던 작은 방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 방은 교회화재로 집을 잃은 강씨댁 노인이 교회 땅에 상추, 파 같은 것을 기르며 거처하던 곳인데
겨우 모습만 갖추고 있었다.

모두 그냥 처다만 보고 있는데
목사님이 웃옷을 벗어 던지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고르기 시작하자
모두 들러 붙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눈에 띄는 분이 한 분 있었다.
원래 원서동교회에 계시다가 오신 분인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앞장서서 척척 하시는 것이었다.
흙 일도 목수 일도 무엇이든지 익숙하게 처리하시었다.
김도영 권사님이 돌아가시고 노인 김장로님은 천주교로 개종하신 후 남자 장년이 없던 때에
임병학 장로님은 교회의 중심에 서서 헌신적으로 일하시었다.
못 박는 일에서 부터 페인트칠하는 것 등
교회 구석구석 장로님의 손길이 안다은 곳이 없었다.
마치 내 집을 가꾸듯이 교회를 가꾸시었다.

대개의 경우 교회에서 하는 일이 많으면 공치사를 하게되고 그것을 빌미로 큰 소리 치게 되기가 쉬운데
그 분은 늘 겸손하게 마치 일하러 온 분처럼 열심히 봉사만 하시었다.
언제나 몸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늘 낮은 곳에서 일한다.
장로로 피택될 때도 늦게 되었지만 교인들의 마음 속의 존경을 받으며 묵묵히 봉사하시었다.
그 봉사하는 열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것이 몹시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감리교 신학대학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 중퇴하신 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임병학 장로님은 목회하는 심정으로 평신도생활을 하신 듯하다.
장로가 되신 후로는 부흥회를 인도하러 나가시곤 했는데
신유은사가 많이 나타나서 이곳저곳에서 초대하는 바람에 퍽 바쁜생활을 하시었다.
끊임 없는 기도와 봉사생활. 늘 기쁜 마음으로 내조하시던 조희복 권사님...
그런 신앙 속에
늘 기쁜 모습으로 맏 아들 노릇을 한 청자, 화끈하게 일하던 정덕, 깔끔한 정숙, 굵은 목소리의 베이스 종규, 인형같이 예쁘던 은희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믿음을 본 받아 정덕은 목회자가 되었고, 청자와 종규는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고 있으며 정숙이와 은희도 존경받는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늘 궂은 일이 있을 때는 그 현장에서 일하셨던 임병학 장로님을 생각해보면서
요즘 내 신앙생활을 반성해 보고 있다.

71. 선생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

선생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얼마 전, 기도원에서 190cm의 큰 키에 늘 반달 웃음을 웃는 정종혁 군을 만났다.
그는 song team 중에서도 기타보다는 drum을 특별히 잘치는 청년인데
그의 노래 반주하는 모습을 보면 동그란 알의 작은 안경을 쓰고
늘 기쁜 모습으로 drum을 치곤한다.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즐겁고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은 참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를 잘 아는 같은 교회의 장로님은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 장로님의 걱정과는 달리 늘 밝고 명랑하였다.

도대체 누가 그를 가르치고 키워 놨을까?
한번은 그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주일학교 때 선생님이 누구셨니?]
그는 서슴치 않고 대답하였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조세형 목사님이구요
중고등부 때 선생님은 서승직 목사님이에요  
그 두분 목사님이 어렸을 때 내 신앙의 기초를 만들어 주신 분들 이에요]
조세형 목사님은 현재 용두동 교회 교회학교 담당 부목사님이고
서승직 목사님은 삼선교회 교회학교 담당 부목사님이다.
두 분 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계신 감리교 목사님들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교회 청년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우리 교회 믿음의 후배들은 ?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쳐 주고 선배가 후배를 지도해 준다.
교회학교 교사는 선생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선배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나?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소개해 주었나?
나로 인하여 실족한 후배는 없었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의 지식은 선배에게서 배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결국 믿음이란 먼저 체험한 자가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내해 줄 수밖에 없다.
누가 스승이고 누가 선배인가?
늘 기쁨 속에 살 수 있는 정종혁 군 같은 형제, 늘 확신 속에 후배를 지도할 수 있는
30대 조세형 목사님과 서승직 목사님 같은 분...
나이와 관계없이 그 분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고 선배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님 안에서 기쁨과 참 평안을 얻지 못하는 한 ,
그들은 영원히 나의 스승이고 선배일 수 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70. Marian Anderson의 Deep River와 임재천

Marian Anderson의 Deep River와 임재천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50년대 중간 이후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 유명 앨토 가수 Marian Anderson이 한국에 다녀갔다.
지금은 믿기지 않는 얘기이지만 그런 유명가수가 오면 대개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공연을 하였고
강당은 꽉 차서 발디딜 틈이 없었으며 복도까지 앉아서 들을 정도로 열성들이었다.
그가 다녀간 후 한국 전체에는 Spiritual 전성기에 들어간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미 8군 에서 활동하던 Jazz가수를 중심으로 극장이나 라디오 어디를 가도
Spiritual은 온 나라에서 불려지게 되었다.

Marian Anderson의 Deep River와 Nobody Knows my troubles I've seen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Louis Amstrong의 Saints come marchin' in등 많은 Spiritual이 교인이거나 아니거나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깊은 강 내 고향은 요단강 저편에 있네
오 주여 나 저 강을 건너 안식에 들어가고 싶어요

아무도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르네
오직 주님만 아시네

오 성자들이 저 천성문을 향하여 들어 갈때
주여 나도 그들중 하나가 되게하소서

Spiritual이 유행하면서 흑인 문학전집들을 활발히 읽게 되었고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갈망하며
백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노예들의 하나님도 되심을 믿고 부르는 노래가 Spiritual이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이 Spiritual은 Jazz와 Blues로 발전하였는데 Spiritual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광적인 표현이 Jazz이고
노예생활의 슬픔을 깊게 표현한 것이 Blues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Jazz나 Blues를 이해할 때 그 배경에 있는 기독교의 영적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수박 겉할기가 되고 만다.
오늘 날 많은 종류의 리듬과 템포로 음악의 다원화 시대를 이루고 있으나
그 시조가 되는 Jazz와 Blues가 Spiritual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요새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라고 하여 모든 종류의 장르에서
크리스천 음악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음악은 Spiritual이나 Classic을 막론하고
모두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노래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해야한다.
Spiritual이 그랬던 것 처럼 Classic의 원조인 중세 바로크 음악도 바로 교회음악이 그 중심이라는 것을 주목해야한다.

Deep River- 오늘 날 우리나라 경제적 현실은
많은 사람들을 건널 수 없는 Deep River 건너편에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강 건너에서 호화스럽게 천국처럼 살고 있는 상류사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들고 있다.

Deep River, My home is over Jordan
Deep River, Lord! I want to cross over into the camp ground

Nobody knows my troubles I've seen
Nobody knows but Jesus
Nobody knows my troubles I've seen
Glory Hallelluia

Oh, when the saints come marching in
Lord I want to be in that numbers

모든 노래는 인간과 하나님이 음악으로 대화하는 또 다른 종류의 기도이다
미국 뉴욕에서 작고한 임재천 장로는 청년시절에 Deep River를 항상 즐겨 불렀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 노래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69. 전산초 장로님

전산초 장로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찬송가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시편 112:1-3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을 생각하시면서 쓴 전산초 장로님의 아버님이신 전영택 목사님의 시편이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와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와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이 시를 쓰신 목사님의 심령에는 이미 천국이 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시사철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봄바람이 부는 가정;
그것은 예수를 섬기는 믿음의 가정에서만 있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죽어서 가는 곳을 천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은 금은보화가 있어서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라는 믿음을 갖어야한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천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씀과 시와 믿음은 전산초 장로님의 인생관이 된 듯하다.
우리가 젊었을 때 전산초 장로님이 남편되시는 분과 팔장을 끼고 다정히 걸으시며
퇴근하여 집으로 가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우영 인영 희영 문영 4형제는 그런 사랑으로 가득한 부모님 밑에서
늘 밝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네 형제 누구를 보아도 어머님의 그 인자하고 사랑스런 미소를 닮은 얼굴과
자랑스러운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회가 어려울 때에는 집을 예배처소로 선듯 내놓으셨고
늘 교회에서는 상하전후좌우를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셨다.
우리는 가끔 성경말씀과 신앙적인 열정만 가지고 장로님께 어필하려 하다가도  
예수님의 모습을 하신 장로님의 웃음띈 얼굴에서 모든 해답을 얻고 스스로 녹아지곤 하였었다.
우리 또래의 청년들을 여러 사람 직장을 알선하여 주셨으며 늘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걱정해 주곤 하시었다.
청년들이 아무리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화난 얼굴로 나무라시는 일이 없었고  
빙그레 웃음 띈 얼굴로 바라보시는 것 만으로 스스로 회개를 하게 만드시었다.
그도 인격자이니 내가 구태여 구체적인 지적을 안하더라도 알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물론 이런 교육에는 솔선수범하는 삶의 자세가 필수적이다.
너무나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전산초 장로님을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셨나보다.
장로님의 무덤 옆에는 연예인 출신 문오장  목사님의 묘가 나란히 있는데
장로님은 육신이 지고서도 목사님의 벗이 되어 부활의 날을 이야기하고 계신듯 하다.

68. 염애경 권사의 부흥회

염애경 권사의 부흥회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한기모 목사님이 계셨을 때 염애경 권사의 부흥회가 있었다.
지금은 부흥회라고 해도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 저녁 시작하여 목요일 새벽기도까지가 보통인데
그 당시는 월요일 저녁부터 시작하면 토요일 새벽에 끝났고 마지막 금요일에는 철야기도를 하면서
은사집회를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통 부흥강사는 다 각각 특징이 있었는데 염애경권사는 입신 시키는 것이 특징이었다.

입신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은사집회에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의미한다.
입신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늘나라를 보고 왔다는 사람도 있고 장래의 일을 예언적으로 보고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염애경 권사의 메씨지 중심은 종말론이었다.
주예수의 강림이 가까웠으니 예수를 잘 믿어야한다는 요지이었다.
집회 때면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저 천국복 얻을 자 회개하라 ~~>라는 찬송을 자주 불렀다.

그러면 찬송을 하다가 눈이 감키는 사람이 있으면 염권사가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서 밀면
잠자듯 드러누워서 입신에 들어가게 된다.
입신은 찬송을 하다가 하기도 하고 설교를 듣다가 하기도 하는데
짧게는 15분 정도 에서 한 시간을 넘게 입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믿음이 없어서 인지 찬송도 열심히 부르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설교도 열심히 들었으나
입신 경험은 하지 못했고 삼청교회 교인보다는 다른 교회 교인들이 입신을 더 많이 하였다.
그 때 국회관사에 살던 40대 후반의 김도영 권사님이 있었는데 믿음이 좋은 인테리였다.
내 바로 앞에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드디어 입신을하였다.
보통 30분 이내에 깨어나서 입신중에 본것을 간증하곤 했는데 권사님은 두시간이 넘도록 깨어나지를 않았다.
강사 염권사는 아마 천당을 많이 구경하고 계신가보다고 하면서 깨어나시기를 모두 기다렸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 천당은 과연 어떤 곳일까?
모두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권사님이 깨어나셨다.
그날 입신했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나가서 간증하는데 김도영 권사님 차례가 왔다.
그런데 권사님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었다.
권사님은 입신해서 천당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이 기도하면서 마루장을 꽝꽝 두드리는 바람에
입신이 되다가 깨어나고 입신이 되다가 깨어나고 그러다가 두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부터 입신한 사람 옆에서는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광고의 말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런 넌센스가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마루장 두드리면서 기도하는 바람에 중단되다니 참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6.25. 이후 전쟁의 앙금이 채 가시지 안은 상태에서
어떤 모양으로던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급하던 때였다.
김도영 권사님은 중앙청 공무원으로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분이 성경지식이나  기독교 상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의지로 억지로 체험하려 할 때
그런 오류에 누구나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이 천지간에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사람과 사는 이곳;
지금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품 천국임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비록 삶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이 곳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준비해주신 에덴동산임을 믿을 수 있어야한다.

67. 이재은 목사님

이재은 목사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우리가 목사님을 뵈오러 교회를 찾아가면 늘 문이 열려 있었고 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고는
사모님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어서와요>
하고 나오시며 방으로 맞아주셨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누가 왔어?>
하면서 서재에서 책을 보시던 목사님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서재에 안 계실 때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하다가 나오시었다.
목사님은 등이 거북이 등이라고들 했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책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시느라고 등이 구부러저서 그런 모습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재은 목사님이 부임하신 후,  불타버린 교회의 폐허 위에 천막을 치기 위해 터를 닦을 때,  
러닝 셔츠 차림으로 삽을 들고 땀을 흘리며 일하시던 모습은 모든 교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목사님은 설교를 하고 심방 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나 해주시는 거룩한 분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분이 우리와 함께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교회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우리와 함께 우리의 방법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격적이었다.
앞장서서 일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에서  교인들은 새 힘을 얻게 되었고
천막을 친지 얼마 안되어 새 교회를 짓게 되었으며 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었고
교회를 통하여 많은 일군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항상 힘차고 자신 있게 일하시었다.
우리는 그 힘과 용기를 어떻게 갖게 되신 것인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목사님은 중학교(6.25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지 않고
6학년까지 있었음) 대대장이셨다고 한다.
지금은 학교 대대장이라고 하면 조회 때 앞에서 차려, 경례를 큰소리로 외치는  
덩치가 큰 학생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6.25 이전의 학교 대대장은 격이 지금보다 높았다.
군대 편제를 갖춘 학도호국단의 지휘자로 유사시 군대의 대대 편제를 갖출 수 있는 그런 조직의 지휘자이었다.

목사님께서는 학교 소년단원(Boyscout) 30여명을 인솔하고 개성서 피난을 나오셨다고 한다.
30여명의 단원들을 인솔하고 부산까지 내려가신 목사님께서는 은영극장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봉사를 하면서 단원들의 숙식을 해결하셨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신학을 공부하시고 군목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교목으로 계시다가 전역하시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행정에 있어서 매우 조직적이시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기관과 속회와 선교회에 소속되게 하시었다.
그래서 누구나 교회에 나오면 해야할 일과 직책이 있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교회 뜰이나 주택에 모여
우리가 좋아하는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그때의 시간들이 자연스러운 카운슬링이 되었고 각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요한 시간들이 되었으며
후에 청년속회로 발전하게된 기초가 되었다.

그 때 목사님과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다양하였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철학에서부터 국가관, 시국관, 동양철학, 서양철학,
심지어 젊은이들을 위한 사랑의 문제도 다루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더라도 누구의 말이든지 진지하게 들어 주셨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항상 그 평소 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우리가 평소 토론하던 문제들을 성경을 통하여 해답을 주곤 하시었다.

그 때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도 가난이나 무식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 적이 없었고 모두 교회를 통하여
사랑과 용기와 보람을 느끼고 살았다.
우리는 목사님과 함께 하던 그 시절을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있다.
그때의 청년들은 지금 모두 60이 넘었거나 가까이된 사람들이지만 그 즐거웠던 낙원을 생각하며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
그 때의 청년들은 목사와 장로와 권사들이 되었지만 지금도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재은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실까>
생각해 보며 힘을 얻고 있다.

언젠가는 수요예배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 위경련이 일어나셨다. 배를 웅켜 잡고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계셨다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온 교인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다.
교회에서 약 5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병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리로 모시고 갈 생각은 않고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때 침을 잘 노으시던  권사 님이 오시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요 예배에 참석하는 남자어른이 별로 없던 때라
모두 권사님만 쳐다보고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권사 님은 목사님을 진맥하시더니 장경련이라고 하면서 시간이 되었으니 먼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침을 놔드려야겠다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권사 님이 대신 인도하신 수요 예배는 30분만에 끝났다.

예배가 끝나자 권사 님이 침통을 꺼내어 목사님의 이곳 저곳에 침을 찌르더니  
얼마 후 목사님의 통증이 멈추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이 일로 두고두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재은 목사님에게 큰 빗을 진 사람의 심정으로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아파서 방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으면
목사님이 예배부터 드리고 천천히 권사님을 찾아 침이나 놔주도록 하셨을까?>
목사님께서는 분명 얼른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어 가셨을 것이다.
<침을 먼저 놓고 나서 목사님이 안정되시는 것을 보고
시간이 좀 늦게 예배를 드리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셨을까?>
<목사님의 병원비를 교회재정에서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하였나?>
<예배를 먼저 드리다가 그 사이 목사님이 잘못되셨으면 어쩔 번하였나!>
우리들은 전형적인 바리새인 이었다.
교인들은 그 때 일을 늘 부끄러워하였고 자랑하던 신앙에서 겸손해지는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사님은 교회음악을 사랑하시었다.
교회가 작을 때에도 늘 성가대와 특별 찬송 순서가 있었고 심지어 다른 곳으로 설교를 하러 가실 때에도
설교전에는 꼭 특별찬송 순서가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종로경찰서 경목이셨기 때문에 매달 유치장 설교를 하시었는데
가끔 목사님의 설교 전에 나는 특별찬송을 했었다.

1960년대 초 어느 겨울이었다.
목사님께서 온양 지방 현충사 부근 어느 교회에서 자비량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가 있었는데
목사님의 설교 전에 특별 찬양을 한 적이 있었다.
온양역에 마중 나오신 전도사님을 따라 하얀 눈길을 걸으며 시골교회까지 가던 일,
새벽기도와 오전성경공부와 저녁예배 시간에 특별 찬송을 하던 일,
냉방이었던 담임 전도사님의 숙소에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일,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을 하던
동화 속에서와 같은 미니 성가대(남녀8명)의 아름다운 모습 등은 잊을 수 없는 목사님과의 추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한 것이어서 우리교회에서 교사와 학생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면서
신학교와 음대를 다니던 <베토벤> 김규현 교수가 바로 그 교회 출신 인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이재은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받은 은혜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청교회 봉사로 보은을 한셈이다.
그는 현재 한국 음악비평가회회장으로 있으면서 음악저널 편집장이고 여러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남서울교회 본성가대 지휘자로 있으면서 한국찬송가를 많이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지금도 아무리 바쁜중이라도 김완호 목사님이나 내가 전화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와서 옛정을 나누곤한다.

생각해보면,
목사님께서는 늘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목사님의 설교말씀 제목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생활로 보여주신 그 모습들은  어느 설교 말씀보다도 강하게 내 심령에 들려오는 로고스가 되어있다.

66. 감신 4중창단 고흥배 목사님

감신 4중창단 고흥배 목사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59년 군에 입대하면서 천막교회 주일학교는 정덕용(장로) 혼자서 맡아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올갠을 칠줄 알아서 올갠반주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려니
퍽 능율적(?) 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로부터 두달 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온 나는 깜짝 놀라게 발전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교회학교는 교사들로 꽉 차서 분반 공부를 하고 있었고 신학교에 다니는
웬 날씬한 미남자 하나가 교회학교 부장 겸 성가대 지휘자로 맹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감신 4중창단 멤버인 고흥배(현재 부평 부광감리교회 목사)선생 이었다.
고선생은 우리보다 3~5살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우리와 함께 어울리면서
청년부, 교회학교, 성가대에서 활동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일이 아마 목회실습 겸 실습전도사 시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고선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이 그치질 않았고 청년부나 교회학교나 성가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게 만들었다.
그때나 이때나 전원이 청년부회원, 전원이 교사, 전원이 성가대를 하면서
주일날은 아침에 나오면 모두 저녁 밤이 늦어서야 헤어지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고선생의 리더쉽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고선생은 27살에 동갑인 지금의 사모님과 결혼하셨는데 집이 먼고로
주일날 일이 늦게 끝나면 청년들과 같이 아무데서나 눈을 붙이곤 했었는데,
한번도 고선생의 얼굴에서 힘들다거나 지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늘 무슨 일을 하던지 즐겁고 기쁜 모습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고흥배 목사님은 지금 부평에서 제일 크고 감리교회서 몇번째 갈
큰 교회(건평 약2,500평)를 증측중에 있다.
교회가 그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분의 중창단 활동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감리교 신학대학에는 학번별 4중창단이 있었는데 고선생이 활동할 때
몇년간은 대학 중창단 콩클대회에서 우승을 도맡아하곤 했다.
대학부의 감신 4중창단은 고등부의 숭실고등학교중창단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중창단의 무엇이 고선생을 성공적인 지도자로 만들었을까?

---다른 사람의 소리와 다른 사람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호흡에
내가 조화를 이루어 가는것---

고선생이 계신동안 온 교회가 평안하고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만나보면
여전히 함박꽃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시면서 입을 열면
금방 무슨 즐거운 소식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다림을 갖게하는 목사님이다.

그 때 그 4중창단이 지금 다 생존들하고 계신지 알 수 없으나
그분이 좋아하면서 같이 불러주던 4중창 찬송가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는
늘 웃음이 활짝 핀 고흥배 목사님의 얼굴과 함께 내게 기쁨을 갖어다 주는 찬송가이다.

65. 코메디언 백금녀

코메디언 백금녀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살살이 서영춘과 뚱뚱이 백금녀는 유명한 콤비 코메디언이다.

그 백금녀의 집이 교회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녀의 어머니와 수양아들 최수열이 삼청교회에 다니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으로 예배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늘 딸이 믿음을 갖게되기를 기도하셨다.

한번은 어머니가 따님에게 교회에 같이 가기를 권했다.

[얘, 교회에 같이가자]

[교회에는 왜요?]

[함께 예수를 믿다가 함께 천당에 가자]

[어머니가 신앙이 좋으시니까 난 어머니 천당 가실 때 어머니 발뒤꿈치 붙들고 따라 갈거에요]

[얘, 극장에 들어갈 때 보니까 극장표 1장으로 둘이 못들어 가든구나. 천당도 마찬가지야]



어느 날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끝내고 돌아온 우리들이

지친 몸으로 난로가에서 이얘기저얘기하고 있을 때 백금녀가 들어왔다.

모두 반가히 맞아 들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전 부터 교회에 나올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에요.

그러나 막상 교회에 나오려니까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잘 오셨에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교회 한 옆 의자에 앉아 한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오히려 떠들석하게 농담을 하던 우리가 경건해져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만난 백금녀의 모습은 코메디언도 연예인도 아닌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으로서 교회를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고민을 짐작하고 있었다.

남편과 이혼한 후 언니의 아들인 최수열을 아들 삼아 정을 붙이고 새 인생을 설계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가끔 지방공연이나 외국공연으로 집을 비운 그녀의 집에서

최수열과 청년속 예배를 드리며 놀다가 오곤했었다.



우리는 당황했다.

모처럼 교회를 찾아온 그녀에게 어떻게 무슨 말로 얘기를 해주면 좋을까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안타까운 그녀의 모습을 뒤로한 채

우리는 한사람 두사람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교회를 찾은 것은 그게 마지막 이었다.

집을 멀리 이사간 후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지실 때 까지 삼청교회로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그 후 백금녀가 교회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교회 구석을 두리번 거린다.

백금녀와 같이 교회를 찾았다가 맥없이 돌아가는 사람은 없는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하나님께서 삼청교회로 보내주신 사람이라면 어떻게하나?

아니 그가 바로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라함이 만났던 천사이면 어쩌나?

백금녀가 어머니의 소원대로 믿음을 갖고 타계했으면 훨씬 우리들의 마음이 가벼울 터인데.....

64. 한기모 목사님- 한병칠 목사님

한기모 목사님- 한병칠 목사님

2002년 2월 3일 한기모 목사님의 막내 아드님인 한병칠 목사님이 삼청교회를 방문했다
삼청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되어 재동초등학교로 통합)를 다닌 한 목사님은 삼청교회가 고향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모두 63 ~88세가 된 44년 전의 고향사람들을 만난 한 목사님은 그리움과 감격으로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옛 날들을 회상하며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한병칠 목사님은 선친이신 한기모 목사님의 숨은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친구인 조신일 목사님의 아들 조진걸 씨에게 눈을 하나 빼주어서 세상을 다시 보게 해주려 했으나 수술대에 누워서 검사한 결과 조진걸씨는 각막 이식으로는 눈을 뜰 수가 없어 중단 했던 일

3.1 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 사건 이후 아무도 가려하는 이 없는 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번 사역지로 제암리교회를 택하였던 일

사후 시신을 연세대 해부학 교재로 기증한 목사님의 유해는 지금도 그 곳 해부학교실의 교재로 보관되고 있다는 이야기

미국유학에 성공하여 프로그램머로 대성하였을 때 아버지의 마지막 헌신을 보고 스스로도 그 고난과 가난의 길인 목회를 선택한 일

큰 아드님 한병일과 함께 사시던 사모님은 98세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

눈물과 감격의 오후예배 설교를 하였다

지금은 미국 노스 캘로라이나 에서 170명 모이는 답슨 백인 교회와 90 명 모이는 이웃 백인교회 두 곳을 맡아서 목회하는 미국 UMC 소속 목사님이시다
방글라데시 선교준비여행 후 돌아가다가 고향에 들렸다는 한병칠 목사님은 2002년 2월 6일 11시 KAL편으로 임지로 귀임했다

63. 한기모 목사님

한기모 목사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최준호 목사님이 사임하시고 교인들의 뜻대로 이번에는 은혜스러운 목사님으로 천안지방에서 감리사를 지내신 한기모 목사님이 부임하시었다.
늘 인자한 웃음을 웃으시며 많은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하시었다.

큰 따님은 결혼하여 군목으로 계신 남편 장기천 목사님(감독회장 역임)과 사택 끝방을 쓰셨으며 둘째 따님 병숙 누님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다니던 미인이었고 큰 아드님 병일이와 둘째 병삼이는 배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막내 병칠이는 온 가족과 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귀염둥이 이었다.

한목사님은 옛날 분으로는 드물게 나팔을 잘 불으셨다.
부임하시는 날 코넷(트럼펫 보다 작은 나팔)으로 찬송가를 연주하셨는데 참 아름다운 연주를 해주셨다.
그리고 둘째 따님의 특별찬송은 그때까지의 삼청교회 음악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말았다.
그 누님 덕에 비로소 발성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모든 청년들이 멋있는 성악가의 음악을 흉내내게 되면서 성가대도 발전하게 되었다.
한병일의 베이스는 멋있는 저음으로 성가대에 안정감을 주었으며 누님과 함께 성가대가 처음으로 모양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었다.

가끔 군목으로 계시던 장기천 목사님이 외출나오시면 설교를 해주시곤 했는데 우리는 그때 처음으로 본훼퍼, 니체 등 신학자나 사상가의 이름과 사상을 들으며 뭔가 알듯말듯 아리송해 하면서도 어떤 새로움을 느끼곤하였다.
장기천 목사님은 감리교 신학대학을 1등으로 입학하고 1등으로 졸업했으며 미국유학을 마친 감리교 준재였다.
그러나 교회가 화재를 당했을 때 공부한 노트가 모두 타버려 퍽 애석해했다.
책은 다시 살 수 있으나 노트는 다시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목사님의 설교에서 신학자나 신학사상 얘기는 거의 사라졌으나 오히려 설교는 더 은혜로워져서 평동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동대문교회에서 사역하시며 감리교 감독회장 까지 하게되신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모든 설교자료가 소실 된후 성경과 기도에만 매달린 이유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한기모 목사님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시었다.
지금도 목사님의 뼈가 의과대학에 보관되고 있다고한다.
삼청교회를 떠나시고 삼선교회를 거쳐 청량리교회 에서 마지막 목회를 하시었는데 삼선교회 수석장로인 문억 장로는 자기가 고등학교 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한 목사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삼청교회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막내 한병칠이 목사님이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아직 만나지 못하였고, 사모님은 큰아들 한병일이와 미국 쌘프란시스코에 사시면서 우리 어머님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크게 반가워 하시면서 삼청교회 근황을 물으셨고 병일이는 친구의 어머니가 오셨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서 미국식 큰 잔치를 베풀어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90을 훨씬 넘기신 사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신지 여부는 무심한 죄인 삼청교인은 안부를 모른 채 또 다른 새 봄을 기다리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62. 임진국 목사님

임진국 목사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6.25 전쟁중 1.4 후퇴 후 서울이 다시 수복 되면서 오신 목사님이 임진국 목사님이다
6.25 전에 계시던 이하영 목사님과는 반대의 이메지를 가지신 분이다.
이하영 목사님은 깡마른 체구에 머리는 중머리를 면할정도로 짧게 깍으셨고 한복을 즐겨 입으셨는데
임진국 목사님은 늘 정장에 흰테안경을 쓰시고 체구는 넉넉해 보이셨든 분 이시다
인진국 목사님의 아드님이신 임한익 선생님은 청운초등학교음악선생,
boyscout 지도자, 어린이 음악가로 활동하신 분이다.

그 당시 서울에는 임시로 도강증(한강을 건늘 수 있는 허가증)을 받은 사람들만 출입이 허락 되었는데
전쟁의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또 후퇴할 일이 생길 때를 위하여
주민의 수를 통제하기 위한 대책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교인은 30명을 넘지 안은 것으로 기억된다.
교회학교 교사회의나 간단한 모ㅎ임을 우리집 안방에서 열곤했는데
임진국 목사님은 예배를 드릴 때나 각종 모임을 시작할 때마다 반드시 부르는 찬송이 있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많은 찬송가 중에 왜 유독 그 찬송만을 부르셨는지 우리는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노인 목사님이 곡조를 아는 찬송이 별로 없으셔서 그런가보다고 웃곤 하였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찬송은 내가 고난 중에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음성으로 내 심령에 들려지고 있다.
고난중에 인자한 모습으로 내게 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은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를 불러 주신 임진국 목사님의 모습이었다.

고성균 장로님은 임진국 목사님 계실 때 세례를 받았다.
김동성 권사의 막내 삼촌 김명한 선생과 친구사이로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아마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던 엄하신 부모님의 허락이 없어서 세례받는 일이 늦지 안았나 추측해 본다.
겨울 크리스마스 때면 학교 제자들을 행사에 참석케하여 교회가 아이들로 꽉 차고 넘쳤던 일이 기억난다.

노인목사님 이시면서도 새벽송을 꼭 하시었다.
그 연세에 어떻게 견디셨는지 궁금할 정도로 열심이셨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서울에 사람들이 다 들어오게 되었을 때 교인들은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젊은 목사님이 오셔야 한다고 하여 후임으로 최준호 목사님이 부임하게 되었다.
임진국 목사님은 삼청교회를 사임하면서 완전히 은퇴를 하시었는데
아드님이신 임한익 선생과 같이 살면서 여생을 보내신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서도
돌아가실 때 까지 찾아 뵙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고난을 위한 기도를 할 때면 신사복차림의 인자한 모습을 하신 임진국 목사님이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를
예수님의 모습으로 들려주시곤 한다.

61. 최준호 목사님

최준호 목사님

임진국 목사님이 퇴임하시고 새로 최준호 목사님이 오시는 날이었다.

어머니와 나, 원복선 권사와 이구연 등
몇 사람이 새로 오시는 목사님을 기다리는데
오후 3시쯔음 웬 청년이 가방을 들고 들어 왔다.

"여기가 삼청교회 입니까?"
"녜, 어디서 오셨에요?"
"제가 오늘 부임하는 최준호 목사입니다."

우리는 황급히 일어나 목사님을 맞이하였다.

사모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으며 돐이 조금 지난 종성이가 있었다.
사모님에게는 친정 동생들이 많았다.
7공주 집이라고들 했는데 목사님의 처제들이 교회에 오면
교회가 꽉 차는 기분이었다.

우리와 같은 또래의 이화여고 다니던 처제와 그 아래로 두명 정도가 자주 왔는데
우리와 성극도 같이하며 학생회 활동도 같이하곤했다.

수원 남양 출신의 최목사님은 젊잖은 미남이셨다.
그러나 달변가는 아니시어서 설교가 늘 부족하다고들 하였다.

그 때 옥인동 살던 한재현 선생이 성가대를 지휘하고
동부 삼청동 홍성배 선생이 주일학교를 맡았으며
청년부와 성가대에는 중동고등학교와 연대 철학과를 다닌 서성태 선생이 있었고
이대 정외과 안병숙 누님과
이구연, 김해성, 안병훈, 최광진, 임재천, 김재형, 송한규
김기숙, 조영자, 홍임선, 홍유선,김희원, 최민자, 원효정, 등이 학생회 멤버였고
교회 주택 끝방에 하숙생이 3명있었는데 그들도 청년회와 학생회에 동참하여서
중고청 합동 회의체인 [삐율라회] 총회 때는 약 60여명이 모였었다.

한동안 교회는 평안하였다.
그런데 박태선 장로와 나운몽 장로등의 부흥회가 시작되면서
각 교회는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한 은혜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었다.
(후에 박태선 장로는 천부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가 되었다.)

최준호 목사님이 퇴임하시고 천안지방 감리사를 지낸 한기모 목사님이 후임으로 부임하시게 되었다.

***서성태 선생은 장로를 거쳐 목회자가 되었으며,
     최준호 목사님은 후에 장로교 목회자가 되시었고,
     최준호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활약하시며 교단장을 역임하시고
     같은 교단에서 활동하시는 서성태 목사님은 최목사님 후임으로
     교단장을 역임하시었다***

60. M.Y.F.서울북지방연합회

M.Y.F.서울북지방연합회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60년에서 1970년까지 10년동안 활발한 연합회 활동이 있었다.
연합회에 주로 참가한 교회는 삼청교회, 계동교회, 자교교회, 종교교회,세검정교회, 중앙교회,
인왕교회, 홍제교회,평동교회, 혜명교회 등 이었다.
활동의 중심은 삼청, 중앙, 세검정, 종교, 자교, 계동 등이었고 여타 교회는 따라오는 정도이었다.

삼청교회 출신 지방연합회 회장으로는 정권모(목사,현 기독교장로회신학연구소 소장), 나,
김득중(목사,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등이 역임하였다.

가) 정권모(목사)의 원래 이름은 정덕길이다.
그는 정덕용 장로를 따라서 삼청교회로 나온 진천 출신인데 한국신학대학을 다닐 때
이미 깊은 신학사상에 몰두해 있었으며 신앙과 신학을 얘기할 때는 늘 정색을 하고 항상 진지하게 얘기하였다.
그는 사람을 잘 웃기는 재주가 있어서 전국연합회 주관 수련회(매년 여름 입석캠프장에서 열렸음)
기간중에는 인기를 독차지하곤 하였다.
경향신문과 기독교방송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한신대학원을 졸업했는데 기독교 방송국 빈방을 빌려
혼혈아를 위한 예배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장로회 특수목회자로 유명하게 되었고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포 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있다가 주모자로 수배되는 바람에
목회를 중단하고 스위스 바젤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시도 잘 써서 젊었을 때 청주에서 시화전을 열기도 했었는데 설교를 할 때는 평소와 달리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삼청교회에서 청년기를 보낸 그의 목회활동이나 가정생활은 독특하다.
항상 의와 불의에 대한 지적이 확실하고 소신껏 일하면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도
시내 어느 큰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다가도 교회에서 대접하는 점심식사를 사양하고
아내와 둘이서 손붙들고 걸으며 교보삘딩 뒤 간이분식집에서 싸구려 수제비를 사먹곤 한다.

나) 경복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4번타자 야구선수 김득중(목사)
고등학교 동창인 내 사촌 원우현(황숙희 권사의 장남, 현 온누리교회 장로)의 권유로 삼청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삼청교회와 안동교회중 어느 곳으로 정할까하고 망서리고 있을 때
청년들의 심방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우리는 모두 매일 만나다싶이 하면서 지냈는데 우리들 중 누가 주일 날 빠지면 의례
즉시 심방하여 못 나온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청와대 넘어가는 길 오른 쪽에 있던 국회 관사에 살았는데 열병으로 주사를 맞으며
힘들게 투병하고 있을 때 문병 온 우리들이 그러케 고마웠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삼청교회에 정착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에 학사편입했으며 미국 뜨루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신약학교수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그의 복음서 강좌는 지금까지 한국신약학계에서 독보적이다.
감신대를 졸업할 때 졸업논문을 영어로 제출한 최초의 졸업생이기도하다.
경복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때 학교와 집에서는 당연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나 상과대학
또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갈 줄로 알고 있었는데 종교학과를 간다고 하니까
학교에서는 실망하고 아버지는 <저 녀석이 교회에 다니더니 미쳤다>고 꾸중을 하셨다고한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목사와 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니 학교선생님이나
부모님의 기대에 못지 안는 큰 성취를 한 셈이다.

다) 연합회 활동은 1년에 한번씩 배화여고 배구코트장에서 열리는 배구대회가 있었고
매달 교회를 순회하면서 드리는 연합회 주관 순회헌신예배가 있었다.
배구대회가 있는 날은 모든 교인들이 같이 참가하는 축제의 마당이었다.
이 때는 각 교회가 야외예배 대신 이 날을 야외예배겸 교인들 친목행사로 이용하였는데
당시 지방회 청년부 간사로 있던 이재은 목사님이 각 교회 담임목사님들에게 부탁하여 그렇게 되도록 힘을 써 주시었다.
삼청교회청년부도 몇번 우승을 했었는데 조명래, 안계갑, 심재현 등 배구를 잘하는 진천출신들과
연세대 배구선수이었던 김실(이필연 권사님 차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삼청교회에는 수십명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주로 진천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진천출신 들은 정덕용장로가 인도해 왔으니 결국 정장로는 교회 중흥에 큰 이바지를 한셈이다.
저녁 시간 배구대회가 끝나고 시상식에서는 우승팀에게 우승컵이 수여되었는데
각 교회에서는 이것을 퍽 영예스러운 것으로 생각들 하였었다.


라) 서울 북지방 목사님들
청년부간사 담임목사 이재은 목사님, 중앙교회 박용익목사님, 계동교회 차현회목사님,
궁정교회 최요한목사님, 세검정교회 김봉록목사님, 인왕교회 유경식목사님, 평동교회 장기천목사님,
홍제교회 김기동목사님, 자교교회 김광우목사님, 종교교회 서형선부목사님 등은
북지방에 있는 청년들을 위하여서는 마치 공동으로 목회하시는 것처럼 만날 때마다 다정한 충고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 종로지방에 있는 60세 전후의 교인들은 다 그 당시 북지방 목사님들이 길러낸 <목양작품들>이다

59. 오후 2시에 부른 X-MAS 새벽송

오후 2시에 부른 X-MAS 새벽송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유엔 연합군은
<평택>을 기준으로 좌우전선을 연결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원>에서 서쪽으로 남하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병점>, <와우리>를 거쳐 <발안장터>를 지날 때에 보니
중공군이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있었다.

<와우리>에서 한 달간을 중공군점령지에 있던 우리는
<발안장터>로 옮기게 되었는데
<발안장터>는 유엔군과 공산군과의 전쟁터 중간이 되어 있었다.

<발안장터>에서 발이 묶인 우리는 1주일간을 꼼짝 못하고
우당탕거리는 탱크에서 쏘는 포소리를 들으며 지날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흰 치마를 어깨에 두른(멀리서 보면 흰 눈과 구분이 잘 안되었다)
공산군 두명이 꽁지가 빠지게 북쪽으로 떠난 반 나절 쯤 후
유엔군의 탱크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정찰하고 오더니
그 다음날 아침 긴 차량행열이 꼬리를 물면서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본 것은 바로
1.4.후퇴 후 다시 유엔군이 반격하는 장면을 본 것 이었다.

우리는 다시 전선에 묶일가봐
얼른 보따리를 짊어지고 올라오는 군 차량행열을 반대로 내려가며
유엔군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길을 가다 말고 진군하는 유엔군 차량들을 보면서
연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면서 절을 하시었다

우리가 피란 간 곳은
셋째 숙모님의 친정인 화성군 우정면 호곡리 버마지란 곳으로
남양을 마주 바라다 보고 있는 <삼기>라는 바닷가 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가 굴과 조개를 줏어다 먹고
방궤를 잡아다 나문쟁이라고 하는 바닷가 어린 풀과
들에서 달래, 냉이, 맹이를 뜯어다 함께 넣고 국을 끓여 먹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전쟁의 피해는 없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그 곳에서 약 십리가 먼 거리에 있는 조암리 장터에 있는
<조암교회>(현재 삼청교회 출신 이종옥 목사 시무)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는데
조암리 입구 언덕바지에 있는 작은 집이 교회 예배처소 이었다.

교회의 간판은 물론 없고 마루에 가루연탄을 진흙에 이겨 넣고 때는 난로를 피워놓고
예배를 드리었다.

교회에는 아이 어른 모두 합쳐서 이십여명이 모ㅎ이었고
목사님 대신 남자 속장님 한 분이 예배를 인도하고 계시었다.

한 삼개월쯤 되었을 때 장로교 장로님 한분이 피난민으로 오시었는데
속장님이 하시던 설교와 장로님이 하시던 설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목사님 없이 계속 예배를 드리었는데
한 반년 쯤 되었을 때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은 특별히 조암장터의 큰집을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인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교인들이 모두모ㅎ여
그 집 마루는 말할 것도 없고 마당 가득히 교인들이 앉고 서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었다.

목사님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시작되자 마자
장내는 곧 울음바다가 되었고
예수님의 자녀로
새 힘을 얻고 힘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예배는 은혜스럽게 끝났다.

그해 여름과 가을이 다가고 겨울이 되었다.
12월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되어 서울에서 처럼 새벽송을 돌게 되었다.

그 때 그날은
눈이 오지 않고 비가 왔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새벽송을 돌았다.
사방 십리에 퍼져 있는 교인들 집을 돌며
차도 먹고 밤참을 먹다보니 날이 새었다.

그래도 우리는 새벽송을 계속 다녔다.
결국 마지막 간 집은 새벽송을 인도하시던 여선생님 댁이었는데
피곤하니 그냥들 가자고 하는 것을 우리는 끝까지 다하자고 하면서
대낮에 우산을 쓰고 새벽송을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새벽송이 끝나고 선생님댁에서 주는 점심을 먹으며
마루에 걸린 괘종시계를 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새벽송이
삼청교회에서 총리공관 새벽송을 마치고
황금색 응접실에서 중국차를 먹으며 지내던 것 보다
훨신 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로 기억되고 있다

58. 겨울에 여름이야기

겨울에 여름이야기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50년 3월1일
3.1.절 기념행사가 동대문 운동장에서 있었다.
기념행사가 끝난 후 종로 화신 앞까지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3.1.절이라고 하여 <3 .1.="">이 선두에 서게 되었다. 
<3 .1.=""> 중에서도 북부단부(삼청동,팔판동)가 호르라기를 하나씩 입에 물고 
호르라기를 불면서 지휘자의 지휘봉 싸인에 맞추어 제일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머리에는 붉은 글씨로 3.1.정신이라고 쓴 흰띄를 두르고 3.1.운동가들의 고생을 생각하자며
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대열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종로 화신백화점 앞까지 이어졌었다.
가슴을 쫙 펴고 행렬의 제일 앞에 섰던 우리는 무슨 이상한 기분과 보람같은 것을 느꼈다.

1949년 여름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3 .1.="">에 입단했다. 
임광남 장로가 교회 큰길 건너편 골목 유명한 복주우물 근처에 살았던 팔판동 토박이이니까
어쩌면 이 일을 혹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매일 저녁 지금의 총리공관 앞에 있던 구미집에 방 하나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 모여서
군가를 배우고 마당에서 제식 교련도 하였다.
가끔 비상나팔을 불면서 비상소집 훈련도 했었다.
1950년 봄이 되면서 소년단 복장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 중 중대장 노릇을 하던 중학생이 하나 입고 왔는데 카키색 유니폼에 색실이 달린
호르라기를 달고 미군이 쓰는 것 같은 <할로모자>(챙없는 모자를 우리는 그러케 불렀다)를
쓴 모습이 퍽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공짜로 줄줄 알았던 유니폼이 적잖은 돈을 내야한다는 바람에 모두 실망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모두들 땀에 절어 옷을 짜서 입을 정도로 더운 여름이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터졌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큰소리 치던 정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가 버린 채 서울은 3일 만에 공산군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해 여름, 3.1소년단의 비상나팔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하기야 중대장으로 있던 예비역 소위도 숨어버렸을 때이니까 누가 나팔을 불라고
지시할 사람도 없었다.

곧 <팔판동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팔판동에서 제일 큰 집에 살던 30대의 젊은이가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여성동맹위원장>에는 우리 아래 집에 살던 산파가 취임하였다.
거의 매일 이런 저런 회의가 소집되었고 모든 집회는 금지되었다.

그날부터 삼청교회 예배가 중단되었다.
그 때 할머니(길영숙 권사)께서는 주일이 되면 한복을 깨끗이 갈아입고 전 처럼
성경과 찬송을 들고 예배당에 가시었다.
예배당에 가실 때마다 가족들과 여러차례 싱강이가 벌어졌다.
<집에서 예배드리세요>
<집에서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실거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시면 할머니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이 나쁘다고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막지마라. 사람이 한번 죽기밖에 더하겠니?>
할머니는 빈 예배당에서 혼자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읽고 하시면서 한 시간의 예배를
드리고 오곤 하시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찬송소리가 밖으로 들릴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곤 하였다.
어떤때는 교회에서 나오시다가 그들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뭐하다 나오시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나옵니다>
<할머니 예배를 금지시킨 것 모르시오?>
<압니다. 그러나 나는 예배를 중단 할 수가 없어요>
<할머니! 젊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으면 벌써 목에 칼들어갔오!!>

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며칠을 우당탕 거리면서 총알과 파편이 쌩쌩거리고 날아다니는 바람에 지하실에
몸을 피해야했던 우리는 중앙청에 태극기가 걸린 것을 보고서야 국군이 입성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석 달후 1월 4일 우리는 온 가족들이 보따리를 이고지고 피란 길에 올랐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또 1월4일이 다가온다.
산에서도,들에서도, 얘배당에서도, 기도원에서도 우리는 마음 껏 소리질러 기도 할 수 있고
내 힘껏 재주껏 소리질러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걱정이 되는 것은

을 보면서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 때와 입장이 달라진 것은, 내게는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삼청교회 교우들과
많은사랑하는 친구들과 이 땅에서 복받고 살아야 할 아들과 딸과 사위와 손자가 있기 때문이다.
모쪼록 주님의 은혜로 평안한 날들이 우리에게 계속 주어져야 할 터인데....................

57. 웅변대회

웅변대회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50년대 중반 삼청교회 삐율라회(중등부, 고등부, 청년부 연합기관)주관으로 웅변대회가 있었다.
작은 양철지붕의 판자집교회였으나 서울 시내 여러교회에 공문을 보내어 접수를 받은 결과
약 20여교회가 참가하였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그런 행사를 주관하였을까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회원들 중에는 중동고를 졸업하고 연대 철학과에 재학중이던
서성태(현재 그리스도교 목사)선배와 사촌 서성국, 후에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선린상고의 송한규, 서울고의 안병훈(현 조선일보 부사장), 성동고의 이구연, 용산고의 김해성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웅변으로 일가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서성태 선배는 박정희시대 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명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그럴 정도니 교회만 작았지 웅변대회를 주최할만큼 당당한 실력들이 있었다.
물론 1등은 삼청교회출신이었느데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안는다.
아마도 송한규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연사로 참가했던 이강소(현 도봉교회 장로)선배는 교회에서 제일 인기가 있던 수도여고 출신
조영자 선배와 연애결혼을 하게되었으니 결국 웅변대회가 연분을 맺어 준 셈이었다.

그 때 심사위원으로 오신 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총평을 해 주면서 한 사람씩 장단점과
고칠점을 얘기해 주었다.
내게는 그 때 얻은 상식이 직장생활 할 때와 권사로 설교를 하게 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송한규가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일이다.
그는 <이 주일의 노래>란 프로를 맡았었는데 여기서 이주일은 코미디언 이주일이 아니고
매 주일 한 곡씩 방송국에서 선정한 새 노래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방송이 시작되면 아나운서가 시그널 뮤직과 함께 <이주일의 노래>란 멘트가 나오는데
송한규는 웅변하듯 인토네이션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그것을 웅변을 하던 습관 때문이라고들 하였다.

그 후로는 웅변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1회로 끝나고 후로는 개최되지 안았다.
그보다 제일 큰 이유는 군사정부시절 말하는 것이 통제되는 사회였으니 누가 웅변을 좋아하드래도
감히 웅변대회를 열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토론하면서 생각을 해야할 일이 너무 많다.
서로 자기의 소신과 주장을 펼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논리적으로 토론해 보는 것,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연습이 될 것이다.

56. 최광진 Story

최광진 story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삼청교회의 역사에 빼노을 수 없는 인물이 최광진이다.
교회학교 유년부장을 오래하였고 교회주보를 원지를 가리방으로 긁어 등사판으로
밀어서 만들 때 오래동안 그 일을 맡았었으며 언제나 우리 모임의 선두에 있었다.
휘문중학교 다닐 때 중등부 회장을 지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산하여
약 1년간 철학 서적을 읽고 하산 하였다.
만화를 잘그려서 만화가로도 활약했으나 교제하는 힘이 부족하여
만화가로 대성하지 못하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가끔 교회 종탑을 사무실 삼아 몇달씩 칩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는 출품할 만화를 그릴 때 이었다.

그는 신앙토론을 할때는 늘 선두이었고 사상을 얘기할 때에도 늘 독보적 이었다.
그의 영향으로 우리 모두는 소위 철학이라는 단어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설익은 철학이라는 뜻으로 개똥철학이라고들 하였다.

그는 기도를 잘하였다.
실제로 많은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서모는 집에서 술장사를 했는데 이 것이 싫어서 집보다는
교회에서 생활을 많이 하였다.
책을 몇권 싸들고 교회에 와서 공부를하고 책을 읽다가 교회에서 잠든 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교회에 있는 시간이 남보다 많던 그는 교회일을 많이 하였다.
홍성배 선생님처럼 그도 많은 봉사를 하였다.

어떤 때는 장사 잘되게 해달라고 집에서 굿을 했다.
그러면 그는 자기 방에서 큰소리로 찬송가를 불렀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그러면 무당이 서모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이다.
저 학생이 찬송가를 불러서 신이 안 내리니 찬송가를 못 부르게 하라고.
그러면 그는 더 크게 부르곤 하였다.
예수 믿는 것을 싫어했던 서모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와서 밥을 먹는 그의 밥상에
신발을 던지며 나무랐다.
그래도 그는 술취한 서모에게 대들지 않고 신발을 밥상에서 내려놓고
그 밥을 다 먹었다.

그는 가정을 선교지로 생각하고 기도를 해왔고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는 우리 집을
매우 부러워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어쩌면 그 친구도 예수님과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고행하는 스님처럼 많은 고생을 하였고 중년에 서모와 사랑으로 화해했으며
결혼하여 성남에 살고 있으면서 금자탑 학원의 국민윤리 강사를 했었는데
침뢰교단에서 목사를 하라고 권한다는 얘기를 들은 후
지금까지 근 십년 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환진갑이 다 지난 최광진의 찬송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가 평생을 사랑하던 찬송가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55. 박태선 장로

박태선 장로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삼청교회 청년들을 위한 얘기)

6.25 이후 박태선 장로의 부흥회가 서울 전체를 뒤흔들었다.
남대문교회의 장로로 있던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사경을 헤메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고 하나님의 신령한 피를 받았다고
하면서 설교를 하고 다녔다.

삼청교회에서도 일주일간 부흥회를 하였다.
설교를 하면서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한다면서 성경책을 들어서
강도상의 책받침을 뚜드리는 바람에 책받침이 다 쪼개지고 말았다.
모두 죄지은 사람의 심정으로 아무소리들 못하고 있었다.
집회가 끝나면 배를 주므르는 안찰을 하였는데 죄가 없는 사람은
배가 물렁물렁하고 배가 딱딱한 사람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면서
더욱 힘을 주어 주물렀다.
나와 김갑기의 차례가 왔다.
배를 만지니까 간지러워서 배에 힘을 주게 되었다.
그랬더니 더 한참을 주므르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곤역을 치뤘다.
김갑기가 안찰을 받자 물어 봤더니 똑같이 웃음을 참느라고
배에 힘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역시 죄가 많은 사람들인가봐>하면서 웃고 말았다.

그 후 박태선 장로는 신앙촌을 만들었고 후에는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없는
천부교를 만들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다가 그도 결국 죽고 말았다.
그가 다녀간 후 교회에는 큰 불란이 있었고 그 후유증은 거의 3년이 넘도록
계속 되었다.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교회 강도상에는 아무나 서서는 안되고 또 아무나 세워서도 안된다는 확신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학교에서는 대체로 청년들에게 신비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에 기적이 없거나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박태선 장로의 경우처럼 잘못에 빠질 우려도 있어서 이지만
그 보다도 청년들에게는 수 십년의 세월이 은사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꿈꾸는 미래를 위하여 40년 계획을 세워보자
그리고 기도하면서 도전해보자
무엇이 불가능한가
주먹을 쥐면 바위를 부술 것 같고
눈을 감으면 저 1000억 개의 은하계가 있는 광활한 우주를 상상하게 되는
젊음을 은사로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 분 이신가 ?

54. 홍성배 선생님

홍성배 선생님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나의 교회학교 선생님은 배재고등학교를 다니시던 홍성배 선생님이다.
긴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껑충한 키에 쉰 목소리의 홍성배 선생님은
절대로 미남이 될 수 없는 분이다.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로서의 그분의 열정은
지금까지 거의 그 유래를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삼청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본다면 김완호 선생님(지금은 목사님)정도가
비슷할 정도이다.

그 분은 동부삼청동에 살던 분인데 집은 잘사는 가정이었고
늘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가는 도중에 교회에 들려 기도를 하고
다음 주에 교회학교에서 사용할 물품들을 준비하셨다.
그분은 특히 성경장면들을 미리 그림으로 그려서 한장씩 보이면서
설교를 하는 시청각 교재를 사용했는데 <가미시바이>라고 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그 분은 청년이 되었을 때 일이었다.
한번은 <교회학교 기>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금방 어디서
붉은 공단 2미터 정도를 갖고 오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의 혼수용으로 어머님이 귀하게 준비해 노은 것을 죽 찢어가지고 온 것이었다.
모두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교회학교에 대한 그분의 열정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한 것 이어서 홍성배 선생님은 교회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삼청초등학교 정문 근처 경찰관사에 살던 미인과
전격 결혼을 하면서 교인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고
지금은 모 교회의 목사님으로 훌륭한 목회를 하신다고 듣고 있다.

내가 홍성배 선생님을 생각할 때 마다 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지금 껏 살아 오면서 그 분만큼 열정적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일 아침이면 전도를 하기 위하여 두부장사 종을 딸랑딸랑 치면서
앞장 서 가시는 그분을 따라 교가를 부르면서 동네를 한바퀴씩 돌던 일이 생각난다.

~~~한양성의 북악산 밑 삼청주일학교는
천진스런 유년들을 주께 인도하는 곳일세
  영광의 우리구주 우리의 대장이 되시도다
만만세 삼청동 유년 주일학교 만세 !~~~~

53. 삼청교회의 종소리

삼청교회의 종소리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주택에서 예배당 강도상으로 직접 들어가는 통로에 종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후에는 교회 문 옆으로 옮겨 졌지만 6.25 직후까지 그 곳에 있었다.
매일 새벽 4시 반과 5시, 수요일 저녁 7시와 7시반,
주일 아침 10시 반과 11시, 주일 저녁 7시와 7시 반
~뗑그렁뗑~ 소리를 내며 삼청동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종은 2번 씩 첬는데 예배시작 30분 전에는 <예비종>을 첬고
<본종>은 예배 시작 직전에 첬다.
보통은 교회사찰이 첬지만 가끔 우리들이 치면서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꼈었다.
~뗑그렁뗑 뗑그렁뗑~
종을 치면서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마음속으로 외쳐보기도 하고
<예수믿으세요 예수믿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칠 때도 있었다.
사찰집사님 외에는 나와 최정호 권사님 아드님인 <서효철>,
지금 조선일보 부사장인 <안병훈>, 행방을 알 수 없는 <최광진>,
소격동 파출소 뒤에 살던 <김갑기>가 단골 손님 이었다.

예비종과 본종은 달랐다.
예비종은 20번 치고 한번 쉬고 또 20번치고 한번 쉬면서 대충 2분에서 3분 정도 첬고,
본종은 쉬지 않고 계속 1분에서 2분 정도 쳤다.
종을 칠때면 ~씰구럭쌜구럭~ 함석지붕에서 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동네 사람 아무도 시끄럽다고 항의 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만 하여도 시계가 흔치 않은 때라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의 시작시간을 알 수 있었으며
저녁 식사시간을 가름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삼청공원에서 내려 오면서 공원을 벗어나면 종소리가 들렸고
중앙청입구에서 교회를 향하여 조금 올라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국동 목욕탕 근처와 청와대 고개, 동부삼청동으로 넘어오는
가회동 마루터기에 오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종소리는 ~뗑그렁뗑~ 늘 맑고 깨끗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소리가 들리는 곳을 삼청교회의 영역으로 선포하는
외침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 종은 1950년대 말까지 새로 지은 벽돌교회의 종탑에 있었는데
1960년대 초 멜로디가 담긴 종소리가 나는 암푸시설을 한 후
주민들의 소음공해 항의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종은 어느 시골교회에 보내졌는데 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감사하다고 특별인사를 하였다.

이제 삼청교회에는 종탑은 있으나 종소리는 들을 수 없다.
삼청교회뿐만 아니라 서울의 어느 교회도 종을 치지 못한다.
소음공해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염불을 외우던 산속의 절에서는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염불소리를 온 산에 들리게 하는데 종을 처서 교회의 예배를 알리던
교회의 종소리는 이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제 누가 그 종소리를 대신 할 것인가?

<주께 두손 모아 비오니 크신 은총 베푸사 밝아오는 이 아침을 환히 비쳐 주소서
오 주여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이 시간 우리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52. 옛날의 삼청교회와 X-mas

옛날의 삼청교회와 X-mas
삼청교회의 옛날이야기

1949년의 크리스마스:
양철 지붕의 판자집 교회는 마루바닥에 조개탄 난로를 때고 있었다
차가운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유독 크리스마스 때만은 교회가 꽉 차고 넘쳐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의 마지막 장면은 성극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 거지를 교회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뜨끈뜨끈한 떡과 군고구마를 사다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교훈으로하는 내용이었다

그 때 거지역을 한 <김재형>은 거지역을 너무 실감나게 잘하여
박수를 많이 받았다

그는 연극을 좋아하여 경기도상 연극부장을 거쳐
기독교방송 제1기 성우생활을 하였고, KBS-TV가 생기면서
방송사극 연출가로 대성하였으며 최근작으로는 <용의눈물>이 있다

성극이 끝나고 경품뽑기를하고 선물 분배가 끝난 후
구경꾼들이 다 가고 나면 학생들끼리 남아 올나이ㅌ(밤새움)을 하면서
놀다가 12시가 넘으면 새벽송을 나갔다

총리공관, 의전병원(지금의 수도육군병원), 파출소 들은 빼지 않고 다녔다
새벽송에서 받은 선물들은 동네 극빈자들(교회정문앞 36번지 판자집 거주자)과
계동에 있는 개척교회 상태의 원서동교회(계동교회의 초기상태)에 갖다 주었다

교회의 벽 쪽에는 긴 의자가 서너개 있었는데 대부분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았으며
노인이신 긴 흰수염의 김장로님이나 50대의 김도영 권사님 혹은 손님이 앉곤 하였었다

마루바닥이라 무릎을 꿇고 앉았노라면 발이 저리고 아팠지만
엎디려 기도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우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도 불편하여 자리를 이리저리로 고쳐 앉으며
시간을 지냈는데 유독 최민자 장로만은 무릎꿇는 것이 익숙하여
늘 조용히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강도상 왼쪽에는 작은 창고가 있었는데
방석이나 청소도구를 넣어두는 창고로 쓰면서
조용한 기도를 원할때마다 그 창고에 들어가
문을 닫고 소리내어 기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