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31일 화요일

인구비례 기독교인의 수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2016년12월1일 현재

우리나라 주민등록 총 인구는
51,696,216 명이다.

21,294,009  세대이며
가구당 인구는 2.43 명이고

남자는
25,827,594  명이며
여자는
25,868,622 명이다.

6.25를 지내면서
남북한 인구는 30,000,000명이고
남한 인구는 20,000,000명이며
북한 인구는 10,000,000명으로
알고 있었다.

1970년~ 1990년
많은 부흥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
10,000,000명만 전도하면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한 20,000,000명 구원은
더 빨리 이루어 진다고 웨쳤었다.

현재 기독교 인구는
10,000,000 명 이라고 한다.

1970년~1990년대의 목표는
이룬 셈이다.

그런데 현실은
절반이 아니라 20%로
줄은 셈이다.

그때의 비율대로 라면
지금 쯤 25,000,000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어야하고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하며 은혜로워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라가 이토록 뒤숭숭해도
교회는 그 변화와 해결논의에서
중심에 있지도 못하다.

지금 우리는
30년~40년 전의 신앙적 열심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대형교회의 성장과 신학의 발전에는
큰 성취가 있었으나

신앙적 깊이와 열정
그리고 경건은

우리들의 선배 신앙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7년 1월 19일 목요일

할수 있는 것과 할수 없는 것/이세형목사

Facebook /이세형목사/협성대학교
20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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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라인홀드 니버의 serenity기도가 생각난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조용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있다.

그렇다. 지헤가 필요하다. 지혜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얻어진다. 하이데거는 죽음 앞에선 존재자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지만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살필 수 있는 곳이 많다. 폴 리쾨르는 우리가 신체를 가진 것에 주목했다. 데카르트의 자기 정립적인 코기토가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정신에 위치시킨 것을 지적하고 있다. 어디 절대적인 정신 세계라는 것이 있을까? 몸의 소리.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지혜로운 자의 삶의 될 것이다. 몸은 우리의 인생을 기억하고 있고 이전 세대의 것까지도 기억한다. 입양된 아이들이 자기 몸의 조상의 언어를 더 쉽게 습득하는 것은 타고난 몸의 기억 때문이다. 몸의 소리를 들어보면 멀리는 자연과 대화도 가능해진다.

유한한 것으로 우리의 언어 세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 않는다. 하는 말과 그 하는 말 속에 담긴 뜻이 다르다. 프로이트는 의식이 주인이 아니고 무의식이 주인이라고 했다. 내 안에 억압된 그것이 억압하는 자아보다 앞선다. 우리가 하는 말의 실수, 실책, 꿈 등은 우리의 의식의 한계를 드러내준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식을 살피는 것을 넘어 무의식을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억압된 무의식은 우리의 삶에 증상을 낳는다. 증상은 우리에게 해독을 기다리는 부정적 상징이다.

상징은 유한한 세계 너머의 무엇을 가리킨다. 인간이 상징을 사용한 것은 지금 나의 한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징은 고유한 의미를 넘어 상징이 지칭하는 의미의 세계로 항하게 한다. 그래서 상징은 다층적이고 다 의미적이다. 그리고 그 상징은 과거의 깊이로 미래의 높이와 넓이로 열려진다. 이 상징을 해독하는데 우리게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고 설명하여 현재의 해석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존재함으로 행하는 사건을 만들며 며래로 향한다.

유한한 우리가 유한함을 넘는 지혜는 해석을 통해 가능하다. 성경을 읽되 해석하며 읽어야 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 광폭한 광신이 나온다. 확신에 찬 목소리들은 해석하지 않고 내 밷는 말들이다. 때문에 해석하려고 하는 이들은 천천히 돌아가는 덕을 지닌다. 해석하면서 나를 알아가고 나를 알아가면서 나의 유한성을 알아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게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타자를 진리의 도상에 선 사람으로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갈 동반자로 초대한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자를 통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이는 엄마와의 만남을 통해 심리가 탄생된다. 아이는 아버지를 만나면서 사회적 구조와 법을 배운다. 기본적인 너가 없다면 나는 탄생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통해 나를 세워가고 알아가고 성장시켜 간다. 내게 너가 있다는 말은 나는 너를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말이다. 유영모는 인간은 사이존재라 했다. 도가 사상에서는 존재가 사이에 존재한다. 유와 무 사이에 존재가 탄생한다. 성서는 혼돈 가운데 말씀과 더불어 존재가 탄생한다. 말씀은 기표이다. 라캉은 기표와 기표 사이에 의미가 미끌어져 들어온다고 했는데 이 의미의 탄생이 자아의 탄생에 다름 아니다. 리쾨르는 기표 이전과 기표 이후의 사이로 의미가 탄생한다. 바로 이 자리가 창조의 자리이고 구속의 자리이고 변화의 자리이다. 새로운 변형은 사이로부터 온다. 이말은 나의 존재가 너와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찌 나를 그렇게 강력하게 확장한다든지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체가 있어 정신이 있고, 상징이 있어 의미가 있으며, 너가 있어 내가 있다면 우리의 말의 세게는 들음의 세계가 먼저다. 기도는 들음이다. 삶은 들음이 먼저다. 배움도 들음이 먼저다. 들음이 먼저라는 말은 지금의 내가 있기전 나의 이전 나의 본원이 있다는 것이다. 들음으로 나의 본원이 드러난다는 말은 들음에 나를 내어줌으로 내가 진정으로 내가 탄생 된다는 말이다. 들음으로 탄생되는 나는 듣기 이전의 나가 아니다.

신체를 입고, 의미를 입고, 타자를 통과한 나는 확고한 나가 아니다. 언제나 변화에 열려진 나이고 끊임없이 탄생되는 나이다. 이것이 유영모가 말하는 젊은이다. 절 묻는이다. 또 하루의 시작이다. 하루는 나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묻지 않고는 가던 길이 멈춰지지 않는다. 멈춤이 없이는 결코 우리가 반복한 것을 돌아볼 수 없다. 우리의 반복을 돌아보는 것이 새로운 정신적 영적 치유의 길이다. 반복을 돌아볼 때 반복한 수를 헤아릴 때 우리는 살아온 것들을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할 때만이 상징을 만들 수 있으며 상징을 해석하는 일로서만이 우리는 의미를 창출할 수있다. 돌아보아 자신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나로 탄생되어 간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는 누구인가 해석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다. 내 존재를 넘어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와 존재자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 넘어섬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의 신비를 경험한다. 오. 내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오. 어찌 내가 하나님을 뵈울 수있으리?!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며,은유와 비유와 담화를 통해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말씀인 것은 말씀을 해독함으로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말씀하셨다. 들어 읽어라.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들어 읽고 읽어 해석하라. 해석의 과정에 들어서라. 해석하지 않아 역사는 반복한다. 반복을 끓으려는 이들은 이제 증상과 증후들을 해석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생각하는 민족의 과제다. 이 깊이에서 함석헌을 외쳤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오.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